<복음>
<눈먼 이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되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22-26
그때에 22 예수님과 제자들은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23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24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5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26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말씀하셨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첫째 날/ 나는 친절과 겸손과 우정으로 나를 가치 있는 삶으로 이끌어 준/ 설리번 선생님을 찾아가겠다./ 손으로만 더듬어 알 수 있었던 선생님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그녀의 모습을 내 마음속에 영원히 간직하겠다./ 그러고는 밖으로 나가 나무와 꽃들 그리고 노을을 보고 싶다.
헬렌 켈러의 ‘내가 사흘 동안 볼 수 있다면’(Three Days to See)이라는 글의 첫 부분입니다. 헬렌 켈러는 한 살 때 심한 열병으로 청각과 시각을 영구히 잃고 캄캄한 절벽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중증 장애인을 앤 설리번 선생님은 정성과 사랑으로 정상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으로 성장시켰습니다. 그것을 알기에 헬렌 켈러는 단 사흘만이라도 볼 수 있게 된다면, 나무와 꽃들, 저녁노을과 밤하늘의 별들보다 가장 먼저 자신을 사랑으로 키워 낸 그 설리번 선생님을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벳사이다의 눈먼 이가 눈을 뜹니다. 그가 육신의 눈을 뜨면서 가장 먼저 바라본 사람이 예수님입니다. 그에게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은, 단지 육신의 눈이 밝아졌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모든 이를 용서하시고 품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얼굴’을 만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오늘의 나를 만들어 내신 분께서 계십니다. 내 인생에, 숱한 사람들과 만남 안에 내 인생을 섭리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의 얼굴’이 있었습니다. 세상 것에 눈먼 이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분이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 눈이 열린 사람은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