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 당신 생애 첫 번째 기적을 갈릴레아의 혼인잔치에서 행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맨 마지막을 보면 <이 기적을 보고 제자들이 믿게 되었다!>
그럼 그전까지는 안 믿었느냐!
안 믿었겠지요.
그냥 엉겁결에 <나 따라오너라!> 하니까 그 양반의 카리스마 때문에 이끌려서
쫓아다녔지만 내 한평생을 이 사람한테 맡길 수 있겠는가!
내 인생을 책임져 줄 수 있을 것인지....
거기에 대한 신뢰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첫 번째 기적을 보고 요한 복음사가는
<그때야 이 기적을 보고 제자들은 믿게 되었다.>
이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의 신성을 조금 보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나 이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다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적을 시작으로 하여 수많은 기적을 하셨지만
그 많은 기적을 보고도 인간적인 마음으로 믿기 시작한 겁니다.
제자들은 '이 사람 쫓아다니면 내가 뭔가 한 자리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그 정도의 정보였겠지요.
아무튼 천주교신자들, 특히 술꾼들이 가장 좋아하는 기적이 바로 예수님이 물로 술을 만든 기적이라고 합니다.
이런 기적만 자꾸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기적은 단순히 술을 숭배하는 뜻이 아니라 그 안에는
예수님을 밝혀주는 수많은 내용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 때나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적이 일어나는 때가 있습니다.
기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장소가 있습니다.
기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을 보면 항상 때와 상황과 장소가 있습니다.
과연 어느 때에 기적을 일으키시는가!
또는 어느 장소에서 기적을 일으키시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묵상해야 됩니다.
이 사건이 일어날 때를 주시해 보면 이 사건은 어느 때 일어났습니까?
혼인잔치 때 일어났습니다.
혼인잔치라고 하는 것은 기쁨을 나타냅니다.
혼인잔치라고 하는 바로 새로운 창조를 의미합니다.
둘이 만나서 한 가정이라고 하는 새로운 창조를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혼인잔치라고 하는 것은 바로 평화를 나타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기적을 주실 때가 언제냐?
기쁨이 있을 때 기적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창조된 그런 분위기 속에 기쁨을 주시고
예수님은 평화의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기적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혼인잔치 때 얼굴만 잠시 비추고 가시지 않고 끝까지 그 집에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너무나 근엄해서 흥을 깨트려버리는 그런 분이 아니셨습니다.
우리는 체험적으로 지위가 높을수록 어느 자리에든지 열심히 참여합니다.
큰 종교행사가 있다면 맨 앞자리서부터 도지사서부터 군수 시장.... 쭉 앉습니다.
그러다가 주교님이랑 어떻게 눈인사를 합니다.
보고가 끝나고 주교님이 나가시면 슬그머니 나갑니다.
굳어있는 사람일수록 사람을 가려서 만납니다.
늘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행동을 많이 취합니다.
어떤 종교인들은 그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침울한 분위기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유희와 행복에 대해서 지극히 회의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우울한 그림자가 덮습니다.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는 사람이 참다운 신앙입니다.
유명한 라틴어 격언이 있지요!
<우울한 성인은 없고 기쁨에 찬 마귀도 없다.>
그리스도 역사 이래 우울한 성인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귀가 이 세상 보든 재주를 다 부린다 하더라도
마귀인지 아닌지의 차이는 마귀에게는 기쁨이라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오만 능력을 다 보여도.....
예수님의 얼굴로 나타나고 성모님의 망토를 걸치고 나타난다고 해도
마귀의 얼굴에는 절대 기쁨이 없습니다.
다른 이가 기뻐할 때 기뻐해야 되고~~
슬퍼해야 할 때 슬퍼해야 되고~~
없는 자와 어울릴 때는 그들처럼 살아야 되고~~
아이들과 어울릴 때는 아이처럼 단순해야 하고~~
노래해야 할 때는 노래해야 하고~~
춤 춰야 할 때는 춤을 춰야 합니다.
술을 마실 때는 같이 술을 마시는 따스함이 있어야 됩니다.
사랑의 분위기를 깨서는 안 됩니다.
제가 어느 본당에 있을 때 그 본당 신자가 군수인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이 어느 날 군수로서, 또는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 어려움을 호소하셨는데
“신부님, 제가 기관장이다 보니까 군내에 여러 가지 행사에 많이 참석합니다. 어떨 때는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에 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행사가 있어서 절에 갔을 때 부처님 앞에서 절을 해야 합니까?
아니면 뻣뻣하게 서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엿 먹어라!
이렇게 해야 합니까? 아주 갈등이 심합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절 하셔야지요!
부처님한테 절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부처를 동양에 파견한 하느님한테 절한다고 생각하고 절 하십시오.
전부 다 절하는데 그 자리에서 뻣뻣하게 서 가지고서는 주님의 기도 하고 구마기도 하면 그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해 지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춤춰야 할 때 같이 춤을 추셨고 술 마실 때 같이 술을 마셨습니다.
애덕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편협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중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사람에게... 세상에게... 사방에게....
열려 있어야 됩니다.
한 영혼을 구하려면 밝고 명랑해야 됩니다.
그렇다고 경거망동하고 허풍을 떠는 수다쟁이가 되라는 그 뜻은 아닐 겁니다.
다정다감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뜻일 겁니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을 단죄하지 않으셨고 희로애락을 같이 겪으셨습니다.
모든 이의 모든 이가 되셨습니다.
이런 멋쟁이가 신앙의 프로들입니다.
우리들은 신앙의 프로가 되어야 합니다.
사제도 프로가 되어야 하고 신자들도 이 세상을 향하여
예수님처럼... 프로처럼 살아야 합니다.
아무튼 기적이 일어난 때가 언제냐!
혼인잔치라고 기쁨의 그 때에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둘째로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주의해 보아야 합니다.
갈릴리의 어느 마을에 보잘것없는 한 가정에서 일어났습니다.
회당에서 일어난 것도 아니고 보잘 것 없는 한 가정에서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군중이 있는 한 가운데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한 가정이라고 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셔야 될 겁니다.
라틴어 격언에 <하느님은 지극히 가정적인 분이시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이 일어났던 장소가 바로 한 가정이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도가 있는 그 가정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서로가 용서하는 그 가정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서로가 화해하는 가정 안에 예수님, 기적을 행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가정이라고 하는 장소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순된 생각과 행동을 합니다.
이론적으로는 이 세상에서 내 가정보다 더 중요한 게 없어!
이것 부인하는 아무도 사람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 부인보다 내 자식보다 더 귀하고 내 남편보다 더 귀한 사람이 없다! 고 하는 것 이론적으로 부인하는 사람 없습니다.
다 인정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가정에서 하는 행동을 보면 얼마나
가족들에게 무례하게 상스럽게 이기적이고 불친절한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깁니다.
집 밖에만 나가면 성인소리를 듣는데 집 안에서는 사탄소리를 듣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너그러운 사람이 어떻게 가족들에게는 그렇게 차갑게 얼음처럼 대할 수 있는 것인지~~
다른 여자에게는 인기 만점인데 아내에게는 5점도 못 받습니다.
많은 경우에 나의 좋은 면을 보는 것은 낯선 집 밖에 있는 사람이고 내 가장 나쁜 면을 보는 것은 늘 나와 함께 생활하는 내 가족이라고 하는 것, 여기에 바로 비극이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가정이 깨어져 나갑니까?
그 사람의 진면목은 집 안에서 드러나지 집 밖에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강한 사람이 아니라 약한 사람들입니다.
약한 사람일수록 가면을 많이 씁니다.
그러기 때문에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무지하게 의식하지만
집 안에서는 내 꼬라지 다 탄로 날 것....
남편한테나 아내한테나 지 편한 대로 마음대로 하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가장 최선을 다해야 하는 장소는 이웃이 아니라 내 가정이 먼저라고 하는 것을 명심합시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의 첫 번째 기적을 나타낸 장소가 가정이라고 하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겁니다.
세 번째로 이 기적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해서 우리들은 주목하셔야 합니다.
동방에서,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손님을 초대해 놓고 술과 음식이 떨어진다고 하는 것은 수치요, 모욕이었습니다.
만일 혼인잔치 하는 그날 그 집안에 포도주가 떨어져 없다고 한다면
그 신랑신부에게는 한평생 꼬리표가 붙어 다닙니다.
'저 인간 시집 장가 갈 때 술도 준비하지 않은 인간들이야!’
수군수군 댑니다.
얼마나 창피하고 가문의 망신이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자기 능력을 타나태신 것은 이 비천한 갈릴리 가정을 수치와 경멸에서 구해주시기 위해서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것은 정말 소박한 사람들을 위해 동정과 이해심 때문에
기적이 나온 거였습니다.
누구나 큰 계기가 있을 때 물불을 안 가리고 그 일에 투신 합니다.
<내가 이 일을 하면 그래도 내가 드러날 수 있다!>
큰 계기가 있을 때는 누구나 큰일을 할 수 있지만
이렇게 단순하고 보잘것없는 경우에도 예수님은 큰일을 하셨습니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오히려 즐거워하고 떠벌려서 좋은 화제로 삼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주인이시고 영광의 왕이신 예수님은 비천한 갈릴리의 젊은 남녀를 수치와 경멸에서 구하기 위해 당신의 첫 번째 능력을 쓰신 겁니다.
이기적으로 이해 타산적으로 자기 탤런트를 쓰기 보다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반드시 그 탤런트를 쓰셨습니다.
내가 드러나기 위해서 내가 가진 재주를 쓰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이지만/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내가 이 사람을 도와주어서 나한테 돌아오는 것이 눈곱만큼도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도와줘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들은 성모님의 모습을 우리는 묵상해야 합니다.
성모님은 아들 예수가 무엇을 하는 지 이해하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았지만
한 번도 아들 예수에 대해서 꼬치꼬치 따지거나 물은 적이 없습니다.
비록 오늘 복음처럼 예수님이 성모님을 거절한 것처럼 보였을 지라도
예수님을 너무나 확실히 믿었기 때문에 시중드는 사람에게 그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성모님이 상처를 받을 수 있는 말을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이해하지 못했을 때도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자매님들, 남편 100% 다 이해합니까?
형제님들, 자기 아내 100% 다 이해합니까?
이해 못합니다.
이해 못할 때라도 우리는 적어도 신뢰해야 합니다.
사랑과 존경과 신뢰 가운데 뭐가 제일 중요하다고 했습니까?
신뢰하지 못할 때는 사랑도 존경도 다 쓰레기통에 쳐 박힙니다.
예수님 잉태할 때에도 성모님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하고 신뢰했습니다.
피투성이가 되어서 만신창이가 된 아들 시체를 품 안에 끌어안았을 때도
성모님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이 자식이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하느님을 신뢰하였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이 무엇을 하시고자 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러나 아들 예수가 무엇인가 옳게 처리하리라고 하는 것은 확신을 하고 있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가 가는 길을 우리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앞에 있는 이 십자가의 무게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예고 없이 닥치는 사건의 이유와 의미를 알지 못할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좋고 나쁜 일이 상호작용해서 선한 결과를 맺게 됩니다.>
올 일 년 동안 여러분 앞에 좋은 일만 이루어지길 바라지만
그러나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들도 분명히 닥칠 겁니다.
그러나 그 일도 우리가 하느님 안에 뿌리만 박고 있다면
결과만큼은 선하게 변해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으시면서
올 한해를 사시기 바랍니다.
이 가나안 기적은 술의 기적이 아니라
첫 번째,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될 때 생기는 기적이요!
가정에서 가족들에게 최선을 다할 때 생기는 기적이요!
성모님처럼 무조건 예수님을 신뢰할 때 생기는 기적임을 믿도록 합시다. 아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주님을 그리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