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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연중 제7주일. 2011년 2월 20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1-02-18 조회수390 추천수5 반대(0) 신고

연중 제7주일.     2011년 2월 20일.


마태 5, 38-48.


오늘 복음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신앙인 앞에 어떤 전망이 열리는지를 알립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을 비롯하여 인류가 지키는 법들이 열어주는 시야를 훨씬 능가하는 전망이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린다는 말씀입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말은 기원전 18세기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을 일컫는 것입니다. 고대 사회가 질서 유지를 위해 만든 법입니다. 잘못한 사람에게는 잘못한 그만큼 보복을 한다는 법입니다. 보복 당할 것이 두려워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못하게 하는 법입니다. 예수님은 보복이 두려워 유지되는 사회질서를 훨씬 넘어서는 어떤 질서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계속합니다. ‘누가 당신의 오른편 뺨을 때리거든 다른편 뺨마저 돌려대시오.’ 그대로 하다가는 남아 날 뺨이 없을 것입니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 겉옷마저 내주시오.’ 속옷 내주고 겉옷마저 내어주면 알몸입니다.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시오.’ 천 걸음을 강요하는 사람에게는 천 걸음만 필요합니다. 그 이상 가겠다고 고집하면 또 뺨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천 걸음을 가주라는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새 법을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법을 가르치는 율사도 아니고, 법을 집행하는 통치자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는 예언자이십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도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새로운 실천을 알리는 예언자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어떤 사람과도 대결의 관계에 들어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이롭게 이해타산하지 않고, 흔연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내어주어서, 이웃과의 연대성을 소중히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우리의 생존이고, 이웃과의 연대성도 그 베푸심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것이기에, 베풂을 실천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인간이 자기 한 몸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하는 처세입니다. 나에게 보탬이 되는 사람을 가까이 하고, 나에게 해가 되는 사람을 멀리하는 것은 동물 세계에서 개체가 살아남기 위해 취하는 기본자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달리 가르치셨습니다.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사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악한 사람들에게나 선한 사람들에게나 당신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들에게나 의롭지 못한 사람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가르친 분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이 하시는 바를 당신 스스로 실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는 후에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을 사셨던 분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악을 악으로 극복하지 않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이 악을 악으로 극복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의 모든 불행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동태복수법은 인류가 만든 모든 법률의 기본입니다. 오늘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가 피해를 준 그만큼 국가 공권력이 벌을 주는 것입니다. 동태복수법의 정신은 이렇게 아직도 인류역사 안에 살아 있습니다. 그 정신에 익숙한 우리는 가해자에게 당연히 복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잘 하는 사회를 정의로운 사회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도 벌주신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악을 악으로 극복하신다고 믿는 데서 나오는 발상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벌하신다는 말을 우리는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것은 흔히 말하는 인도주의(人道主義)적 박애주의가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의 도리를 다 하기 위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시야에서 잃지 않았던 것은 하느님이었습니다. 사회의 질서와 인간관계를 보는 우리의 시야에도 하느님이 살아 계셔야 한다고 그분은 믿었습니다. 인간 사회를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우리의 노력에도, 하느님이 살아 계셔야 한다고 믿으셨습니다. 악은 하느님 안에 없습니다. 악을 악으로 퇴치하며 질서를 보장하겠다는 생각은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그분의 자녀는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정의를 부르짖으며 남을 성토하고 비난하는 것은 그리스도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생명이고, 인류의 연대성이기에, 우리가 추구하는 질서도 당연히 베푸심으로 채색된 것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자비, 사랑, 용서 등을 기본 질서로 한 인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십자가 앞에서도, 아버지의 뜻을 빌며 그것을 감수한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서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살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세례는 한 순간에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주는 마술이 아닙니다. 자유를 지닌 인간입니다. 우리의 자유가 하느님의 자유를 배워 살도록 하겠다는 그리스도 신앙입니다. 부모에게서 태어나고 그 호적에 이름이 올랐기에 그 생명은 부모의 자녀가 다 된 것이 아닙니다. 태어난 생명은 오랜 양육의 시간을 거치면서 그 부모의 정신과 삶의 자세를 배웁니다. 그래서 그 부모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을 배워 그분의 정신을 실천할 때, 그분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 있게 하자는 운동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겠다는 운동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우리 삶의 모든 여건 안에 살아계시게 하겠다는 운동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과 용서가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살아 있게 살겠다는 그리스도 신앙입니다.


자비와 사랑과 용서는 나약함이 아닙니다. 부모가 나약해서 자녀를 사랑하고 용서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녀와 경쟁하지 않고, 더 많이 가져서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부모는 베풀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부모는 알든, 모르든, 자녀 앞에 하느님에게 기원이 있는 삶을 삽니다. 내어주고 쏟아서 베풀었다는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이기에 그분은 하느님 안에 살아계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열어주신 전망 안에서 살라고 말합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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