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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7주일 지극히 인간적인
작성자원근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1-02-19 조회수387 추천수3 반대(0) 신고


지극히 인간적인
마태오 복음. 5,38-48/연중 제7주일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우선 수긍이 가야 실행하지 않겠는가. 지금까지 자신들의 마음이며 몸 이며가 길들여졌던 것은‘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출애 21,24)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생판 다른 가르침을 설파하셨다. “앙갚음하지 말라.”(마태 5,39)

한 술 더 떠서 왼 뺨을 때리는 자에게 오른 뺨도 대주어야 한다니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옳은가? (마태 5,39) 도대체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하고 자신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단 말인가?(마태 6,44)

아무렴, 랍비(=사부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어련하겠는가. 예수님의 명(命)이시라면 그냥 눈 딱 감고 따라야 옳겠지! 아무리 궁굴려 생각해 봐도 그 깊은 뜻을 헤아릴 길이 없던 그는 그쯤에서 무조건 복명(復命)하기로 마음을 다져 먹었다. 알았습니다. 사부님!

하지만,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었다. 다른 것이 아니라 ‘몇 번’까지 그래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엇다. 당시 랍비들은 인간이 베풀 수 있는 용서의 횟수를 최대 ‘세 번’ 으로 가르쳤다고 한다. 그의 생 에 예수님은 격이 다르게 말씀하실 것이 뻔했다. 그래서 딴에는 파격적으로 마음을 써서 ‘일곱 번’으로 올려 물었다.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일곱’이라는 숫자는 정족수(定足數)를 상징하는 수였으니, 그가 예수님의 칭찬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해도 무리가 안 되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답변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22절)

이 말씀에 그는 ‘내가 또 빗나갔구나!’하고 실망하지 않았다. 상처를 받지도 않았다. 오히려 답답한 가슴이 뚫리는 쾌감을 맛보았다.

옳거니, 바로 그것이었구나. 용서란 ‘무조건’ 베푸는 것이로구나. 용서란 주판알을 튕기듯이 하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로구나. 예수님이 원하시는 용서는 그냥 억지로 눈감아주고 참아 주는 정도의 용서가 아니었구나. 아직도 분노를 가슴에서 삭이고 있는 정도의 용서가 아니었구나. 그것을 넘어 자비심으로 헤아려주고 무상으로 베푸는 용서를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이로구나. 마음 한 구석에 아무 것도, 아무 조 건도 남기지 않고 모든 감정을 놓아 풀어주는 용서를 말씀하신 것이로구나. 결국 횟수가 아니라 질을 말씀하신 것이로구나.

하지만 그가 머리로 알아들은 이 가르침이 그의 가슴에 까지 내려오고 그의 뼛속까지 깊이 스며든 은 훨씬 이후의 일이었다. 사부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40일간 발현하시면서 비겁한 ‘도망자’요 ‘배반자’요 ‘자격 박탈 자,’인 자신에게 베푸셨던 무한정의 용서를 체험하고 나서야 그는 사부 의 속 깊은 의중(意中)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꿈엔들 그가 알았을까. 어쩌면 그에게 불만의 투리였을지도 모르는 이 부담스런 가르침의 최대 수혜자가 자신이 될 줄을.

누가 뭐래도 그의 가슴에 가득한 것은 충심(忠心)이었다. 사부님께는 그림자도 밟지 않으려는 그 순 한 충정을 사부님은 아시는 듯 했다. 말로만이 아니라, 겉으로만이 아니라, 그의 속마음이 그랬다. 그도, 사부님 사랑은 불타고 있었다. 그날 성만찬의 자리에서 사부님이 대야에 물을 담아 가지고 오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실 때에 자신의 차례가 되자 그는 송구스러움에 어쩔 줄을 몰랐다. “안됩니다. 제 발만은 결코 씻지 못하십니다.”(요한 13,7)

오버한 것이 아니었다. 깊은 무의식이 얼떨결에 튀어나온 것이었다.‘저는 사부님 그림자도 못 밟는데 어떻게 제가 감히 발을.’

그러자 사부님 말씀이 그의 순진한 고집을 허물어트렸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이제 나와 아무 상관도 없게 된다.”(8절)

평소 사부님과의 만남을 일생일대의 축복으로 알고 있던 그였기에 이 말씀 한 마디는 그대로 주효 다. 사부님과 친밀하게 해주는 일이라면 야 사양할 일이 있겠는가. 그는 ‘손’과 ‘머리’까지 들이 밀었다.

오버인들 어떠랴. 필경 사부님의 마음은 흐뭇했으리라. 비록 나중에 잠시 부인했을지라도 그의 본 마음이 이처럼‘큰 사랑’으로 가득했음을 사부님은 기특해 하셨으리라.

때로는 장점이 바로 단점이 되고, 강점이 곧 약점이 되기도 한다. 그에게 병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나는’이라는 병이었다. 자만심이라는 병이었다. 그 날의 장담도 바로 이 고질병의 발로(發露)였다. 사 부님께서 미구에 닥칠 사태를 예고하시면서“오늘 밤 너희는 다 나를 버릴 것이다.”(마태 26,31)라고 말 하시자 그가 큰소리쳤다.

“비록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마태 26,32)

이에 사부님께서 다시 새벽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당신을 부인할 것이라고 예고하자, 그는 함께 죽는 한이 있어도 결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호언하였다.

그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나는 다르다. 다른 제자들은 유혹에 넘어갈지 몰 말도 나는 안 넘어간다. 나는 자신 있다.’

이점에 있어서 그는 성전에서 세리와 비교하며 만족해하던 바리사이를 꼭 빼어 닮았더랬다. “오, 하 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루가 18,11)

자기 자신이 다른 제자들 보다 낫다고 여겼던 것, 그것이 그의 병이었다. 그가 자신의 강점(强點)이 고 여기고 있던 바로 그 점이 그의 취약점(脆弱點)이었다.

정말 그랬다. 그의 약점은‘나는’이라는 병이었다.‘나는 다르다’,‘나는 강하다’, ‘나는 능력이 있다’, ‘나는 충실하다.’

언젠가 사부님이 그에게 사탄이 밀을 까불듯이 그를 시험할 것이라고 하셨던 것(루가 22,31)은 이런 그의 자의식(自意識)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을 터이다. 태초에 뱀이 이브를 꾈 때 부추겼던 것도 바로 그 자의식이요 자존감(自存感)이 아니었던가.“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 나무 열매를 따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이 아시고 그렇게 말하신 것이다.”(창세 3,5)

사부님께서는 그가 진실로 교회의 반석이 되기 위해서는 그의 자아의 세계에 개벽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고 계셨다. 이윽고, 시험의 시간이 엄습했을 때, 그의 내적 우주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이열치열(以治熱)이라고 했던가. ‘나는’의 장벽을 무너트린 것은‘나는’이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태26,72)

그렇게도 자신 만만하던 그의 자신감은 서슬퍼런 빌라도의 법정에서가 아니라 단지 심문의 장소에 과했던 가야바의 집에서 무너졌다. 그것도 칼을 든 군인들의 위협이 아닌 한갓 ‘여종’(마태 69절)의 에 그는 비참하게 무너졌다. 심지어 거짓말이라면 천벌이라도 받겠다며 발뺌을 하는 처절한 내면을 드러내면서 허물어졌다. 그날 그는 철저하게 무너져 내린 자아(自我), 더 정확히 말하여 ‘자신’(自神)의 허물 앞에서 “몹시 울었다.”(75절)

이 사건은 그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이후 그는 말도, 행동도, 믿음도 180도 바뀐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자신의 능력에 의지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예수님과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돈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자렛 예수 그리 도의 이름으로 걸어가시오.”(사도 3,6)

그는 이제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 보다 하느님께 복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사도 5,29)

마침내 그는 헤로데에게 체포되어 다음날 사형에 처해 질지도 모르는 공포의 옥중에서 수족이 결박 고 보초들이 지키는 가운데서도 ‘잠을 자는’(사도 12,7) 담대함을 보일만큼 믿음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는 믿음이 무엇인지, 믿음 안에서 변화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훌륭한 사표(表)인 것이다.

주님,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아신다. 그 때 그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는지. 얼마나 면목 없었고, 얼마나 낙심하고 계시었는지. 주님은 다 아신다. 그가 얼마나 깊은 자괴감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는지.

모르긴 몰라도 그 고뇌의 늪은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마지막으로 고기를 구워먹었던 그 티베리아 호수(요한 21,1)보다도 더 깊었으리라. 그것이 그렇게도 아렸던 것은 그 만큼 그가 주님을 사랑했었기 때문이었을 터. 꼭 그 사랑의 크기만큼 그는 괴로워했던 것이다. 그렇다. 괴로움은 꼭 사랑의 크기만큼 괴로운 것이다.

그런 그에게 주님이 다가오셨다. 주님께서는 세 번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16절)

세 번째 물음에 그의 슬픔이 폭발하고 말았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17절)

세 번 배반했던 그에게 세 번의 물음은 묘하게도 영약(靈藥)이 되었다.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속 깊이 새겨졌던 상처 ‘세 덩어리’가 그대로 사라진 것이었다.

감쪽같이 치유된 그 자리에 주님께서는 대신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사명을 새겨 넣으셨다. 그 세 처가 있던 바로 그 자리에 꼭 세 번 문신(文身)을 새겨 넣으셨다.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15절, 16절, 17절)

그리고 이 문신이 그로 하여금 65년 네로 황제의 대 박해 때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게 했다. 운명의 순간에 그는 주님께 이렇게 기도했는지도 모른다.

“주님, 이제 아시겠지요. 제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차 동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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