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찬미예수님
다 카페가족들입니까?
카페하고 나하고 상관없는데 그냥 왔습니다..오늘 미사 있다고 해서...괜찮아요...
손 들어 보세요.
친부모님이 다 살아계신 분, 한 번 손 들어 보세요.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만 살아계신 분
반대로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만 살아계신 분
‘나는 고아다!’ 하시는 분
아, 불쌍하네요...어쩌다 고아가 되셨습니까?
어저께 돌아가신 아버지가 참 보고 싶었어요.
돌아가신지 올해 5년째인데...청주에 천주교교구 묘지가 있어요.
오늘 아침에 거기를 갔더니 세상에~~한산해요.
그 넓은 데에 아무도 없어요..더워서 그런지...
우리 아버지 묘가 좀 높아요...바로 윗칸이 바로 우리 할아버지 묘인데..
할아버지한테 가서 먼저 절 드리고...또 아버지한테 가서 절을 하고...
가서 보니까 소주를 안 가지고 간 거야..술을 드려야 되는데...
“그냥 제가 집에 가서 대신 먹겠습니다. 제가 먹는 걸 아버지가 드신 걸로 생각하시고..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편안하게 무덤에 등도 기대고.. 무덤도 한 번 끌어안아 보고...
뺨도 한 번 대 보고...나이가 먹어도 자식한테 아버지는 역시 아버지예요.
여러분들, 어제 저녁부터 무슨 생각했어요.
‘감곡에 가야 되겠다!’
감곡에 와야 되는 이유가 뭐였어요?
김 신부 보러?
아니면 성모님 보러???
성모님만 온전히 보고 싶다고 해서 왔다고 하면 오빠는 서운하지^^
쪼끔은 신부님도 보고 싶어서 왔다~~그래야 덜 서운하지~~
제가 오늘 아버지 보고 싶어 아버지 찾아갔듯이
여러분들도 성모님 보고 싶어서 오셨을 거예요.
오늘 복음 이야기 기억나세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이 얘기가 어디에 나옵니까?
구약성서의 출애굽기에 이 말이 나오지만...실제로 구약성서는 이 말을 다른데서 가져온 거예요.
현존하는 법전 가운데 제일 오래 된 법전이 기원전 1700년 전에 만들어진 함무라비법전인데
그 안에 눈을 다치게 한 사람에게는 눈으로 보상을 하고 이를 다치게 한 사람에게는
이로 보상을 해라!
다시 말하면 동일한 댓가의 복수를 하라!
이것은 구약의 중요한 윤리의 한 부분으로 구약성서 작가가 끌어다 붙인 것이지요.
출애굽기에 임신한 사람을 쳐서 아이가 유산하면...쭉 보면
맨 뒤가 눈은 눈으로, 손은 손으로..발은 발로...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멍은 멍으로...이것이 명시가 되어 있어요.
‘참, 구약의 법은 잔인하고 야만적인 율법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전연 그렇지 않아요.
눈에는 눈으로...이렇게 똑같은 형태로 보복하는 것을 동태복수법이라고 하는데..
내가 당한만큼만 똑같은 형태로 복수하라는 뜻이지요.
‘니가 복수할 한계는 거기까지다.’
복수의 한계를 분명히 한 것이었어요.”
솔직히 여러분들은 어떤 인간이 내 이를 뿌러뜨렸어...
여러분들은 이만 뿌러드리고 오겠어요. 손목아지 다 부러뜨리고 오지요.
니가 당한만큼만 복수하라!
어떻게 보면 사랑의 법이예요.
우리는 당한 것 몇 배로 갚지요.
그래서 구약의 이 법을 잔인한 법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복수의 한계를 거기까지다! 라고 했지
실제로 그렇게 행하라는 말은 아니었어요.
율법에도 동태복수법...똑같이 당한만큼만 해라!
실제로 유대인들은 노동으로 처벌을 바꾸었어요.
우리가 알다시피 손으로 지은 죄 손을 잘라라!
아니, 천만의 말씀.
아랍의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들이 손이 죄를 지으면... 손을 잘라요.
예수님 시대에도 그런 짓은 하지 않았어요.
더 이상의 큰 복수를 막기 위해서 니가 당한만큼만 해야 되지 않느냐!
이 법은 재판관들의 지침법이었어요.
재판을 할 때 그 사람이 형량을 과도하게 형벌을 해서는 안 된다 !
재판관은 칼자루 쥐고 있는 사람들이지요.
마음대로 죽였다...살렸다...할 수 있으니까 사람이 지은 죄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알아서 그 지은 죄만큼만 죗값을 부여해야지...
감정에 치우쳐서 더 큰 죄를 부여해서는 절대 안 된다!
구약의 이러한 동태복수법도 엄밀하게 따지면 하느님의 사랑에서 나온 법이라는 것,
여러분들이 알고 계셔야 됩니다.
지가 당한 것만큼 복수하는 것마저도 오늘 예수님은 금하셨어요?
아니면 더 하라고 하셨어요?
지가 당한 것만큼 복수하는 것마저도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하시면서 누가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도 같이 내놔라!
누구 싸대기 갈겨 보신 분 한 번 손들어 보세요.
나는 싸대기 한 번 때려 보았다!
군대 있을 때 쫄병?
사람의 뺨을 한 손으로 때릴 때는 손바닥이 이렇게 가지요?
다른 쪽 뺨은 절대 손바닥으로 때리지 못해요...자연히 등으로 때리게 되어요...
이렇게 이렇게~~~그치요?
유대인들이 가장 치욕스럽게 여기는 게 뭐냐..
내가 저 놈의 손등에 맞았다는 것이 죽고 싶을 정도로 치욕스럽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뺨으로 맞으면 이 뺨마저 대라!
그 뜻은 뭐냐?
이 뺨을 맞으면...다른 이 쪽은 손등으로 맞을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싸대기를 양쪽으로 맞는 것을 유대인들은 치욕감으로 느낀다 이거지요.
다시 말하면 맞는 행위뿐만이 아니라 맞음으로 오는 모욕과 멸시까지도
앙갚음하지 말 것이요.. 분개해서는 안 된다~~그 뜻입니다.
우리는 사실 누구한테 맞을 때 맞는 것 자체도 기분이 더럽지만
맞고 난 뒤에 훨씬 속상할 때가 더 많지요.
그럴 때가 있어요.
그저께 초상이 나서 연도를 하고 나오는데 아줌마들이 모여서 지들끼리
수군수군 거려~~
“저 신부님이 김웅열신부님이래!”
“어머, 그래!”
신발을 신고 돌아서려고 하는데 웬 여자가 탁 치면서
“신부님!”
어깨를 한 대 맞아서....깜짝 놀랐지요?
보니까 생전 처음 보는 여자야.
설령 아무리 친하다 하더라도 지 아들 놈 때리듯이 탁 때리더니 얼굴에다가 그냥 침까지
튀어가면서 ....초상집에 와가지고 한바탕 할 수도 없고...
아픈 게 문제가 아니고 플러스 알파가 더 기분이 나쁜거예요...그치요?
유대인들은 이 뺨을 맞았다는 것이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저 놈한테 손등으로 맞았다고 하는 것이 더 기분 나쁘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복수를 하려고 그래요.
예수님은 맞는 것뿐만 아니라 맞는 것 때문에 그 모욕까지도 절대 앙갚음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람한테 물리적으로 맞을 수도 있지요.
물리적으로 맞는 것보다 더 마음이 아픈 것은 뭐로 맞는 거예요?
혓바닥으로 맞는 것, 집회서 28장 17절
<사람이 매에 맞으면 맷 자국이 남지만 혓바닥에 맞으면 뼈가 부서진다.>
부부싸움하고 치고..박고.. 그래서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어도..
사우나 가서 계란 굴리고.... 며칠 지나면 그 멍이 영원해요? ...없어져요?
없어져요.
그런데 눈탱이 갈기면서 한 그 말은 못 잊어요.
그 말은 죽을 때까지 가져가요.
오죽하면 돌에 새긴다고 그랬을까요?
시어머니 죽은 지 20년이 넘었는데... 그 시집살이하면서
시어머니한테 당했던 말..시어머니 죽은 지 20년이 지났어도
다 기억하며 살아요.
신혼 초에 남편이 신혼여행 가서 친정집 깔보았던 말
“너 혼수 해 온 게 그게 뭐냐!”
그 부인은 죽었다 깨도 그거 안 잊어버려요.
물리적으로 맞으면 아프기는 하지만...그것보다 훨씬 더 한 것은 맞으면서 오는 모욕,
그 멸시는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까지도...앙갚음하지 말아야 된다! 분개하지 말아라!
오늘 우리들은 구약의 법이 얼핏 보면 잔인하고 무자비한 법으로 보일지 몰라도 구약의
동태복수법은 엄밀한 의미에서 하느님 사랑의 법이라고 하는 것....
아마 이 세상이 자기가 당한 것만큼만 복수를 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망가지지 않았을 거예요..그렇지요?
대개는 자기가 당한 것의 수십 배를 줄려고 애를 써요.
자기가 당한 것 열 배, 스무배...를 보복을 하고... 살인을 저지르잖아요?
구약의 법도 신약의 법도 하느님 사랑의 법이지만
오늘 예수님은 더 적극적이고 더 힘이 강한 법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동태복수법까지도...아예 앙갚음하려는 마음마저 지워야 된다!
살면서 미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또 살아가다가 분노 때문에 힘들어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나 흐르는 물에 씻어버리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받은 감사하는 마음을
늘 표시를 해야지요.
여러분들, 하루하루 살면서 주변에 같이 사는 사람에게, 한솥밥 먹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다는 말 몇 번씩이나 하고 삽니까?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천국팔언이라는 게 있잖아요.
天國八言을 하고 살면 아름답게 변해간다고 했어요.
다른 사람의 입에서 ‘고맙습니다.’ 하는 말은 참 듣고 싶어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하기가 정말 인색한 것이 아닌가!
어떨 땐 저도 그래요.
내 깐에는 외국에 나갔다 왔다고 여러 군데서
바리바리 싸가지고... 여행을 다니면서 가지고 와서 같이 사는수녀님에게도 선물을 주면....
받아가지고 “아이~~신부님, 고맙습니다!”
하면 어디가 덧나!
한 마디도 안 하면 성질이 나지요.
그때 생각을 해요...사제나수도자는 늘 받는 입장이다 보니까
고마워 할 줄을 모를 수가 있어요.
저도 교우들에게 늘 받는 입장이다 보니까 고맙다는 말을 잘 못 하고 당연히 받는 줄 알아요.
그런 모습을 보면 내가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더라~~
‘아, 다른 사람이 날 보면 이렇겠구나!’
그 다음부터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들 마음에 있는 주관적인 것들... 얼마나 잣대가 맞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 잣대를 가지고 항상 하느님을 재고, 사람을 재려고 하다가 상처를 받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님이 오늘 얘기 하신 오른뺨 치거든 왼뺨 내밀어라!
하는 것 결코 쉬운 일 아닙니다...어찌 쉬운 일입니까?
쉽진 않지만 적어도 노력은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서 ‘저 놈 용서 못해!’
아예 포기 해 버린다고 하면 신앙인들이 아니지요.
오늘 이 미사에 불러주신 것 감사드려야 합니다.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 카페에서
가톨릭성가 45번 / 참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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