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미사] 보편지향 기도의 역사와 의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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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0-08-13 | 조회수2,941 | 추천수0 | |
보편지향 기도의 역사와 의미
간청은 “보편 지향 기도”또는 “신자들의 기도”라고 부르며, 말씀의 전례를 끝맺는 것으로써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으로 다시금 도입되었다. 이 도입은 공의회의 명확한 요구에 응답이었다 (SC 53). 우리는 미사 전례에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어떤 시대에 배척을 받아 버려졌던” (SC 50) 한 요소로 여기서 해야만 한다. 사실 신자들의 기도는 미사의 가장 오래된 부분이었고 이 기도에 대해서 유스티노는 두 번에 걸쳐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위를 보라). 그는 세례 후에 이어지는 성찬례와 연관하여 이 기도에 대해 말한다: 세례 성사를 받고 (공동체의 말씀의 전례 후에) 새 영세자는 공동체의 집회로 인도되어, 그들은 “거기서 우리 자신을 위해, 비추임을 받은 (세례받은) 사람을 위해, 사방에 살고 있는 다른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를 드린다” (호교론 제1권, 65). 신자들의 기도는 또는 주일 말씀의 전례에서 고정된 요소였다: “ (강론 후에)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함께 서서 기도를 오린다” (호교론 제1권, 67). 이 점에서 전통은 동방과 서방에서 매우 잘 증언하고 있다: 동방에서는 “사도 헌장” (Constitutio Apostolica) (약 380년)과 (예물 행렬 전에 하는 청원기도 (litania)로) 오늘날까지; 로마에서는 히뽈리뚜스 이래 그리고 젤라시오 교황 이후 (성금요일을 제외한) 쇠퇴한 장엄한 로마 간청들에서, 그리고 거행의 시작에 키리에 청원기도에서 어떤 방식으로든지 보여진다. 오늘날 간구들은 구조에서 그것들의 올바른 자리로 되돌아왔다. 이것들은 liturgia verbi, 즉 하느님 말씀의 거행의 결론을 구성한다.
말씀의 전례 끝에 하는 이러한 기도는 고대부터 전례에서 최상의 등급을 누렸다. 오로지 세례를 받았고 교회와 충만한 친교를 이룬 사람들만이 참여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 기도는 제관인 하느님 백성의 기도를 잘 표현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히뽈리뚜스는 기도를 바치기 전에 세례받은 이들과 세례받지 않은 이들과의 분리에 대해 말한다 (18장). 왜냐하면 세례받지 않은 이들의 기도는 “아직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유스티노는 새로 세례받은 이들만이 집회의 간구에 참여하도록 허용할 것이라고 명백히 말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전례는 오늘날 예비자, 참회자와 마귀들린 자들의 퇴장을 위한 신장된 예식을 보존하고 있다. 비록 그것이 어떠한 실천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말이다. 오로지 그것 후에만 “신자들의 기도”를 낭송한다. 왜냐하면 이것 때문에 간청 기도는 서방에서도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oratio fidelium, “신자들의 기도” 라는 이름을 가졌다. ......
성서는 서품받은 사람과 평신도로 구성된 하느님 백성 모두의 사제직을 정확히 가르친다.“여러분은 선택된 민족, 왕다운 제관, 거룩한 겨레, 하느님께 속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1베드 2,9). 특별히 히브리서에서 대제관직로서 해석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하신 그리스도 그분과의 결합을 통해서 공동체는 사제적이다. 교회의 몸의 머리로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구성원을 위해서도 일하신다: “모든 기관이.... 자라고 또 자라서 사랑으로 스스로를 세우게 됩니다” (에페 4,1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충실한 증인이요 죽은 이 가운데서 제일 먼저 나신 분이며... 우리를 사랑하여 당신 피로 죄에서 풀어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왕국을 이루어 당신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셨다” (묵시 1,5-6). “성 교회의 필요를 위하고, 위정자를 위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하고, 모든 사람과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총지침 45) 하느님 백성이 기도할 때, 하느님 백성은 온 세상을 대표하여 보편 사제직무를 정확히 수행하는 것이다.
이 방법에서, 집회의 “사제적 전구”는 벌써 성체성사적 제사로 넘어가는 것, 좁은 의미로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거행을 묶는 연결고리를 형성한다. 이 연결고리는 특히 요한 크리소스토모 전례에서 명확히 드러나는데, 신자들의 기도와 (예물을 가져가는) “장엄한 입당” (great entrance)은 밀접히 연결되어있으며, 전구는 예물 준비의 한 요소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도 모든 전례 전통의 빛에서 보면, 라틴 미사의 새로운 순서는 더 옳다: 장엄한 전구는 구조적으로는 말씀의 전례를 끝맺는다. 그리고 성찬 거행을 위해 제대와 예물의 준비로, 뭔가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 즉 미사 전례의 두 번째 큰 부분. 공의회는 미사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간구를 재도입하는 필요성을 올바르게 깨달았다. 그리고 교종 또한 그가 새로운 미사 전례서를 소개하는 교황헌장에서 이 요소에 특별한 강조를 두었다.
그리고 신학적 의미를 위해, “모든 미사에서 보통으로 이 기도를 하는 것이 좋다” (총지침 45, 참조 33). 그리고 주일에만 이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다. 집회가 참석하지 않는 미사를 거행하는 경우에는 이 기도는 선택적이지만 (총지침 220), “사제가 지향을 말하면 복사가 응답한다” (총지침 220)고 하면서 이 기도를 바칠 수 있다.
전구들의 내용은 온 교회의 필요, 공적 권위와 세계 구원, 특별한 필요를 갖고 있는 모든 사람의 지향,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대에 둘러 있는 집회의 지향이다. 견진, 혼인, 장례 들처럼 특별한 거행에서 특별한 경우를 반영하기 위해서 포함시킬 수 있다 (총지침 46).
한편, 전구는 하느님 백성의 사제적 개입으로서의 고유한 구성부분이고, 그래서 미사의 독립적인 부분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다른 한편, 전례 구조에서 보면, 이 기도는 말씀의 전례의 결론을 구성하며, 그래서 미사의 이 부분에 포함된 선포의 모든 요소들을 인식하지 않은 채 단순히 방치할 수 없다. 따라서 간청은 이전에 일어난 것에 관해 확실히 언급할 수 있고, 특히 지향들을 제시하고 축일의 신비에 관해 언급하면서 그렇다. 그러나 강론에 첨가된 도덕적 부록으로 전구들을 만드는 것은 틀린 것이리라. 전구는 기도이지 선포가 아니며, 확실히 그리스도인 삶을 위한 길잡이가 아니다.
신자들의 기도의 가장 본성적인 이유로 인해, 전구는 백성들에게 속한 전례 부분이다. 이 기도는, 전례 행위의 끝이나 또는 전례 행위의 어떤 부분 (보기를 들어, 예물들이 준비된 후에 하는 예물 기도, 또는 영성체 후에 하는 끝맺음 기도)에서 항상 기도로 되어 있는 경우처럼, 주례자가 하는 주례 기도가 아니다. 아직도, 사제가 자기 직무의 힘으로 전구들을 이끌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긍극적으로 사제는 또한 하느님 백성의 부분이며, 그리고 교회와 세상의 지향을 위한 전구 기도를 하는 공동체에서, 우리는 보편 사제직과 서품된 사제의 특수 사제직무 모두를 포함하면서, 가장 인상적인 방법으로 전 공동체의 사제직무를 미사에서 드러나는 것을 발견한다. 따라서 총지침 47항에서 주석은 전구를 바칠 수 있도록 하는 조언이 첫 자리를 차지한다: “기도를 지도하며, 간단한 권고로 신자들에게 기도할 뜻을 자극해주고, 맺음 기도를 바치는 것은 집전 사제의 의무이다. 기도 지향은 부제나, 성가대원이나, 다른 적당한 사람이 말하는 것이 좋다. 교우들은 공동으로 응답하든지 침묵으로 그 기도 지향에 동의한다” (총지침 47).
전구는 말씀의 전례 끝에 다시금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고대 로마 전통을 어느 정도까지 복구한다. 그러나 아주 옛날의 형태를 중복시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성금요일에 이른바 orationes sollemnes (장엄 기도)에서 보존될 수 있었다.
[출처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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