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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연중 제8주일 2011년 2월 27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1-02-25 조회수402 추천수4 반대(0) 신고

연중 제8주일          2011년 2월 27일


마태 6, 24-34.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오늘 복음은 시작하였습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목숨을 부지하는 일에 너무 매달리지 말라고도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새들과 들에 핀 꽃들을 예로 듭니다. 새들이 먹는 일에 고민하지 않아도, 먹고 살며, 들에 핀 꽃들이 자기 치장에 애쓰지 않아도, 아름답게 입었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신앙인은 먹고 마시는 일에 또 자기의 명예를 찾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기’ 위해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투신(投身)해야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복음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로움이라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하나의 생명체로서, 먹고 마시며 삽니다. 그리고 사람은 사회성을 지녔기에 그 사회가 자기에 대해 하는 자리매김도 중요합니다. 신앙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간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 생명의 기원이 하느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나타나는 가치관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을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로움’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지배하는 나라, 곧 하느님이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계신 삶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이 ‘그 의로움’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삶을 지배하는 원리, 곧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배려, 사랑, 용서 등의 원리를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 시작에 두 주인을 함께 섬기지 못한다는 원칙을 먼저 제시하였습니다. 사람은 단편적이라, 한쪽을 떠받들면, 다른 한쪽은 업신여기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는다는 신앙인에게도 재물은 주인으로 쉽게 등장합니다. 재물을 많이 갖고 누리는 데에 도움이 되는 신앙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재물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합니다. 그것을 가지면, 살기에 편할 뿐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대우도 받습니다. 그 편함과 그 대우에 정신을 빼앗기면, 사람은 그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착각하고, 오로지 그것을 향해 매진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로움’을 소홀히 합니다. 


자유롭게 살라고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입니다. 동물이 식물보다 더 자유롭다고 말할 때, 동물은 원하는 것을 찾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자유롭게 창조하셨다고 말하면서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 1, 27)고 말하였습니다. 인간이 참으로 자유로운 것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스스로 실천할 때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창조하고, 창조한 것을 사람들에게 베풀며,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탈출 33, 19 참조) 일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그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면서 그분이 고쳐주고, 용서하며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스스로 실천해 보이셨습니다. 그분은 그것 때문에 유대교 지도자들의 미움을 받아 생명을 잃었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그분과 생각을 달리 하는 사람들이 그분을 제거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고 그분을 십자가에 죽게 한 사람은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결정하고 그것을 집행한 사람은 로마 총독이었지만, 그 처형이 이루어지게 그분을 고발하며, 공작한 것은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이 임박하였을 때, 그들을 성토하거나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면서 죽음으로 나가셨습니다. 루가복음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당신을 죽이는 이들을 위해 용서까지 빌었다고 말합니다(23, 34).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인류역사에 많이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 역사의 현장에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로움’을 찾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신앙인이 살아야 하는 모습입니다. 그것이 참으로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증오에 증오로 맞서지 않는 것이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인류역사 안에 출현한 종교적 직관들은 인간이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살라고 가르칩니다. 얼마 전에 입적(入寂)하신 법정스님으로 말미암아 각광 받은 ‘무소유(無所有)’라는 단어가 있고, 우리가 잘 사용하는 청빈낙도(淸貧樂道)라는 단어도 있습니다. 모두 종교적 직관을 배경으로 한 인간의 참다운 자유, 곧 재물의 노예가 되지 않은, 어떤 경지를 표현하는 단어들입니다.


그리스도 복음은 무소유 혹은 청빈낙도의 경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부자가 있고 가난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비극이라 말하지도 않습니다. 루가복음서가 전하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16, 19-31)에서 복음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비극이라 말하지 않고, “부자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도” 라자로가 배를 채우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비극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이 말하는 참다운 부자는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진 것을 나누어서 관대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바울로는 고린토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부유해져 매우 후한 인심을 베풀게 되고, 우리를 통하여 그 인심은 하느님에 대한 감사를 불러일으킬 것입니다.”(2고린 9, 11) 재물을 삶의 목적으로 삼지 말고, 하느님의 자비를 나타내는 도구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착각을 잘 합니다. “착각은 북한에서도 자유”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재물이나 명예가 관련 될 때 우리는 아전인수(我田引水) 식의 착각을 잘 합니다. 그런 것을 얻어내기 위해 있는 신앙인 양 착각도 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어떤 역할을 맡으면, 그것이 섬김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자기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신분인 양, 다른 사람들 앞에 군림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도 그런 착각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쉽게 착각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착각에서 우리를 깨어나게 하는 그리스도인의 기도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부르면서 그분이 아버지로 우리 안에 살아 계시게 빕니다. 그러면 우리의 착각들이 보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착각들입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나라를 찾고 있는지, 내 나라를 찾고 있는지, 아버지의 뜻을 찾고 있는지, 내 뜻을 찾고 있는지를 반성하게 하는 기도입니다.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며,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이라는 사실도 우리가 기도 안에 잊지 말아야 진리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 간청할 것은 그 믿음의 부족을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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