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한 친구는 든든한 피난처로서,
그를 얻으면 보물을 얻은 셈이다.
성실한 친구는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
어떤 저울로도 그의 가치를 달 수 없다.
성실한 친구는 생명을 살리는 명약이니,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그런 친구를 얻으리라.”
친구.
한자어인 이 말을 그대로 풀이하면
‘오랫동안 친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보면 될까요?
그런데 오랫동안 알고 지내지만
안지 얼마 안 된 사람이 더 친한 경우도 있으니
기간의 짧고 긺이 친구의 근본 조건이 아니고
친함의 정도가 더 중요한 조건일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 친해야 친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같이 있으면 편한 친구라야 하겠습니까?
속 얘기까지 할 수 있는 친구라야 하겠습니까?
무슨 말이든 다 할 수 있는 친구라야 하겠습니까?
변함이 없이 나의 편이 되어주는 친구라야 하겠습니까?
힘들고 지쳤을 때 피난처가 되어주는 친구라야 하겠습니까?
내가 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는 친구라야 하겠습니까?
다른 사람은 못하는 쓴 말도 서슴없이 해주는 친구라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정도는 돼야 참 친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 자 하는 편한 사이지만 속말은 할 수 없는 사이라면
친구이기는 해도 진정 친한 친구라고 할 수 없을 것이며,
나의 편이 되어주고 나를 지지해 주지만 쓴 말은 못하는 사이라면
이도 진정 친한 친구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진정 친한 친구를 얻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고
이런 친구를 얻는 것은
오늘 집회서 말씀처럼 보물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집회서 말씀에
의미심장한 구절이 또 있습니다.
“성실한 친구는 생명을 살리는 명약이니,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그런 친구를 얻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친구이고,
이런 친구는 하느님을 경외할 때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누가 생명을 살리는 친구입니까?
간을 떼어주고 자기는 죽는 친구입니까?
꼴베 성인처럼 대신 굶어죽는 친구입니까?
물론 이런 친구가 생명을 살리는 친구입니다.
그러나 오늘 집회서가 얘기하는
생명을 살리는 친구는
생명이신 하느님께 친구를 인도하는 친구입니다.
인간적으로 자기를 다 내어주는 친구일 뿐 아니라
친구를 영적으로 인도하는 친구입니다.
그러니 이런 친구는
인간적인 의리나 친밀함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이 하느님을 너무도 경외하기 때문에 자기를 내어주고,
친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친구입니다.
글라라에게 프란치스코가 이런 친구였고,
프란치스코에게 글라라가 이런 친구였듯이 말입니다.
-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