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이 제 젖먹이를 어찌 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인간은 자주 자기 경험대로
하느님도 그러 하시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따듯한 사랑을 받은 사람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면
즉시 자기 아버지를 생각하며
하느님도 따듯한 사랑의 하느님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반대로 버림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
특히 부모로부터 버림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하느님도 자기를 버리실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이사야서는
젖먹이에 대한 어미의 지극한 사랑을 들어
하느님의 사랑을 얘기하며
그런 어미도 젖먹이를 혹 버릴 수 있지만
하느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고 얘기합니다.
제가 아는 새터민 형제 하나는
몇 년 전 작은 배를 타고 넘어오다
풍랑에 배가 뒤집혀 데리고 오던
어린 아들을 바다에서 잃었습니다.
자기가 일부러 버린 것도 아니고
불가항력적으로 잃은 것인데도
자기가 죽고 그 아이를 살렸어야 했는데 반대로
아이는 죽고 자기만 살아있다는 죄책감으로 너무 괴로워
매일 같이 술을 마시고 저에게 전화하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이 일부러 버린 것이냐?
할 수만 있었다면 자신이 죽어서라도
자식을 살리지 않았겠냐?”고 죄책감을 덜어주려고 말하면
물론 그랬을 것이라고 하면서도 그래도 죄스럽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고,
이것이 사랑의 이치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절대로 자식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불행해지더라도 자식이 행복하기를 원하고,
자신보다 자식에 대해 더 걱정합니다.
그래서 자식이 자신을 걱정하는 것보다
부모가 더 걱정합니다.
제 경우도 정작 저는 제 걱정하지 않는데도
어머니는 제 걱정하십니다.
젊은 사람이 감기 걸려봤자 별 거 아닌데도
감기 걸리면 돌아가실 수도 있는 노인네가
도리어 자식이 감기 걸릴까 걱정을 하시니
제가 어떤 때 짜증이 나 쓸데없이
왜 걱정을 하시냐고 타박을 해도
여전히, 그리고 아직도 걱정하고 계십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이런 어머니 사랑보다 하느님 사랑이 더 크니
무엇을 먹을까 또는 입을까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나보다 더 나를 위해 걱정하시니
이 하느님 사랑을 믿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걱정을 한다는 것은 하느님 사랑을 믿지 못하는 것이니
하느님 사랑을 믿는다면 제발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혹 어머니는 사랑하지만
힘이 없어 자식을 굶길 수도 있지만
하느님은 사랑하실 뿐 아니라 전능하시니,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는다면 절대로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믿는다면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는 걱정하지 맙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안위를 위해서는
하느님 대신 걱정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도 사랑하시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나보다도 하느님께서 그를 더 걱정하시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 대신 우리가 그들의 어머니가 되고,
당신 대신 우리가 그들을 걱정하고 돌보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다 돌보실 수 없어서
각 사람에게 어머니를 대신 보내셨다고 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느님 대신 그들의 어머니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제가 새터민들을 위해서 일하는데
그중에서 젊은이들을 대할 때면
특히 미안하기도 하고 마음이 아리기도 합니다.
저에게는 비록 노인네이지만 아직 어머니가 살아계시는데
이 아이들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또는 부모를 떠나서 여기 혼자 와 있습니다.
여기서 태어난 아이들은 부모가 다 뒷바라지 해주는데도
힘들다고 아우성인데 이들은 혼자서 모든 것 해결해야 하고
힘들어도 어디 얘기할 곳 없습니다.
이것이 이들의 외로움입니다.
그래서 명절이 되면 제가 이들을 부르고,
결혼하여 애를 낳게 되면 병원에 가서 애도 받아주며
제가 대신 이들의 부모가 되어주려고 하지만
남자이기에 어쩔 수 없이 부족하고 소홀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저 대신 이들의 어머니가 되어줄 사람 없을까 생각합니다.
아마 하느님도 저처럼 생각하실 겁니다.
누가 나대신 이들의 어머니가 되어줄 사람 없을까?
-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