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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는 레지오를 택했다... [허윤석신부님]
작성자이순정 쪽지 캡슐 작성일2011-02-28 조회수665 추천수7 반대(0) 신고
 
 
 
 
 

1952년 광주에 있던 우리들은 붉은 군대의 점령후

 

한 개의 본당이라도 되찾기 위해 열과 성을 바쳐 노력하고 있을 때였다.

 

 

붉은 군대의 돌풍이 하나의 전주곡으로

 

진짜 돌풍이 우리를 강타했는데

 

그것은 영혼의 바람이었다.

 

 

그 해에 천명에 달하는 회개자(평상적으로 750명 정도였다)와 함께

 

그 바람은 확실히 우리가 바라는 방향으로 불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바람의 힘도

 

대부분 자발적으로 회개한 8000명 가톨릭신자의 조그마한 지체를 압도할 처지가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의 계획을 위해

 

그리고 평신도 혹은 성직자들을 위한 기금이 없었다.

 

 

한 조직체 안에서

 

회원이 밖에 나가 바람직한 회개자를 얻기까지

 

찾아다닐 것을 서약한  "더블 무브먼트" (이중봉사활동)라는

 

한 예외적인 종교사업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우리의 액숀단체는 평범하고 무질서했고

 

풍부한 대화가 없어 행동도 제대로 되지 않고 용기도 없었다.

 

 

그 해 여름 일본을 방문한 나는

 

아주 확신에 찬 레지오 단원이

 

미군 영내에서 공개 강론을 하는 자리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물론 나는 중국에서의 레지오의 위대한 업적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레지오활동이 시도된 적이 없었다.

 

 

나는 안내서를 공부하고 그 활동방법이 강조한

 

사도직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이 마음에들었다.

 

 

그리고 레지오활동을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최종적으로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레지오 교본은 실제적으로 레지오 정신에 위배될 때 용기를 잃는다고 간주했고

 

또한 교본은 적절한 부분에 결정하고 싶어하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한 단체를 시도함에 있어 부주의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나는 형제와 자매, 그리고 혼성으로 된  세 쁘리시디움을 조직했다.

 

 

1953년 목포에 있는 교구청(가톨릭센터)에서 였다.

 

 

나는 주의깊게 단원들을 선정했다.

 

 

잘 알려진 신자보다는

 

기본적으로 인간성을 갖추고

 

너그럽고 의지적으로 보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교본이 요구하는 바를 배우도록 하였다.

 

 

내가 레지오교본에서 판단했던만큼...

 

 

처음에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적 덕행이었다.

 

 

새로운 레지오 단원들이

 

진지하게 모든 규율을 따라 인내할 수 있도록

 

나는 새 쁘리시디움 모두의 영적지도신부로서 직접 지도를 맡았다.

 

 

나 역시 연구하고 지도할 좋은 기회도 갖지 못했으며

 

그들과 마찬가지로 미숙했다.

 

 

우리는 게다가 영어와 일본어로된 교본에 의존해야 했던 것이다.

 

 

레지오가

 

발돋음하기 위해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중 무엇보다도 시간 엄수의 문제가 나를 피곤하게 했다.

 

 

많은 덕성을 지녔어도 한국인들은 시간을 기키는 데는 소홀했다.

 

 

이 한 가지 이유로 나는 레지오의 장래를 낙관하지 않았다.

 

 

거센 폭풍이 몰아치고 있던 어느날 밤

 

레지오 단원들이 성체강복 후에 가질 계획이던

 

레지오 회합에 참석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들어

 

나는 본당 신부에게 회합을 다음날 저녁으로 연기될 거라는 전갈을 보냈다.

 

 

성체강복이 끝난후 나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여니 원세실리아 자매가 서있었는데

 

그뒤에는 모든 여성 쁘리시시디움단원들이 서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주교님, 주교님은 매 회합때 마다 시간을 잘 지키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회합을 연기하거나 무산시킬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여기 왔어요"하는 것이었다.

 

 

이 일이 한국에서 레지오의 첫 번째 기적이었다.

 

 

이후 회합은 정시에 시작했다.

 

 

약 1년후

 

나는 단원들과 일어난 엄청난 변화를 다 쓸 수가 없다.

 

 

그들은 진정한 자기희생의 고결한 정신과 성화에 뚜렸한 성장을 보였고

 

숙련된 팀과 같은 기능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확장시키려는 열의를 느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시기상조라고 느꼈다.

 

 

2년 후 1956년 나는 에드워드 멕벨로이 신부를 초청 했다.

 

 

그는 골롬반회 신부로 사도적 단체를 육성하기 위한

 

상하이 꾸리아 영적지도 신부였다.

 

 

그는 우리 레지오 단원들을 기술과 레지오 정신에 있어

 

75퍼센트로 평가했다.

 

 

그가 말했다.

 

 

"당신은 뚜껑을 열수 있습니다. 레지오를 확장시키십시오."

 

 

나는 레지오를 소개하는데 망서리지 않았다.

 

 

7년간 레지오가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고

 

나는 지금 어떠한 후회도 없음을 솔직히 말 할 수 있다.

 

 

1933년 한국에 온 이후

 

 

 내가 했던 일중 최상의 일은

 

 

레지오를 알린 것이다.

 

 

 

W.헨리대주교(광주 대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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