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님,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 3.3,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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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11-03-03 | 조회수417 | 추천수8 | 반대(0) 신고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1.3.3 연중 제8주간 목요일 집회42,15-25 마르10,46ㄴ-52
“주님,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볼 수 없어 무지의 어리석음입니다. 구원은, 믿음은, 행복은, ‘눈’에 달려있습니다. 있는데도 없이 사는 것은, 부자인데도 가난하게 사는 것은, 행복할 수 있는 데 불행하게 사는 것은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볼 수 있는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구원은 볼 수 있는 눈을 지니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대로 볼 수 없어 오해와 편견이요 가난과 불행입니다. 말 그대로 풍요속의 빈곤입니다. 풍부한 은총의 선물 속에서 가난한 거지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의 길가에 앉아있는 ‘눈 먼 거지’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는 무지로 눈 먼 우리 가난한 인간실존을 상징합니다. 바르티매오의 개안(開眼)의 과정은 그대로 미사의 과정이자 영적 삶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길가에 앉아있는 ‘눈 먼 거지’는 깨어 주님을 기다리는 갈망의 사람을 상징합니다. 갈망으로 깨어 기다릴 때 찾아오시는 주님이요 본능적으로 주님을 알아 챈 바르티매오의 기도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눈 먼 거지 바르티매오처럼 우리 역시 깨어 갈망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자비 송을 바치며 미사를 시작했습니다. 하여 끊임없이 주님의 자비를 청하는 동방 수도승들의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가 그리도 좋습니다. 지체 없이 자비 송의 기도에 응답한 주님이십니다.
“그를 불러오너라.”
주님의 이 말씀을 눈 먼 거지에 전하는 이들의 다음 말씀이 참 은혜롭습니다.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입니다. 살기위해 용기를 내어 일어나 부르시는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어부들이 그물을 놔둔 채 주님께 나갔듯이 눈 먼 거지 역시 운명의 족쇄 같은 겉옷을 벗어던지고 벌떡 일어나 주님께 나아갑니다. 과거와의 결별을 뜻합니다. ‘눈 먼 거지’에서 ‘눈 뜬 왕자’의 삶으로’ 구원의 전환입니다. 이어 스승 예수님과의 대화가 그대로 스승과 제자 간의 선문답(禪問答) 같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바르티매오는 물론 이 미사에 참석한 ‘눈 먼 거지’같은 존재인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단도직입적 물음입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구도자의 소원은 이 대답 하나뿐입니다. 간절하고 절실할수록 답은 짧고 순수합니다. 세상에 볼 수 있는 눈을 지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모든 불행은 볼 수 없는 무지의 어리석음에서 기인합니다. 눈으로 보고 깨달아 알 때 치유요 구원의 자유입니다. 불승들이 추구하는 돈오의 깨달음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구원 선언이기도 합니다. 믿음 있어 눈이 열려 볼 수 있는 구원의 기적입니다. 눈이 열려 다시 볼 수 있게 된 바르티매오는 주님을 따라 길을 나섭니다. 그대로 미사가 끝나고 파견되는 우리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눈이 열려 주님을 뵙고 주님을 따라 길을 나설 때 비로소 구원의 완성입니다. 매일이 새 하늘, 새 땅, 새 날입니다. 집회서의 말씀이 바로 이 구원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업적은 그분의 말씀으로 이루어졌고, 주님의 업적은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다. 그분의 업적은 얼마나 아름다우며 얼마나 찬란하게 보이는가! 누가 그분의 영광을 보고 싫증을 느끼겠는가?”
활짝 열린 믿음의 눈으로 봐 깨달아 알 수 있는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참되고 좋고 아름다운 세상만물이요 저절로 찬미와 감사의 삶이 뒤따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눈을 활짝 열어 주시어 당신을 뵙고 따름으로 늘 충만한 행복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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