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제정 말씀과 축성(Narratio institutionis et consecratio) 그리스도께서 최후만찬 때에 제정하신 제사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로써 이루어진다. 그리스도께서 빵과 포도주 형상 아래 당신의 살과 피를 바치실 때, 사도들에게 먹고 마시라고 그것을 주셨으며, 그들에게 이 신비를 지속하라는 명령을 남겨주셨다 (총지침 55d). 기도문은 최후만찬 중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현재화시킨다. 주례자는 그 말씀을 새롭게 되뇌면서 그리스도의 동작을 완수한다. 그러나 단순히 한 기억이 아니고, 기념이다. 기념은 그리스도의 역사적 행동 (공생활)과 성목요일 만찬과 선포된 십자가의 제사의 현재화 (재현),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자리 (hic et nunc)에서 일어나는 사건임을 드러내준다. 그리스도의 몸은 당신 신자들인 우리를 위해 참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죄사함을 위해 많은 사람들을 위해 흘린 참된 새 계약의 피이다. 매번 성체성사는 거행되고 당신을 믿는 이들의 구원을 위해 이루신 주님의 죽음을 선포하며, 모든 목소리를 다해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나라를 간청한다. 신학적 구조 아버지께 감사드림 (감사송)과 성령의 현존과 활동(첫째 에피클레시스)은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집중된다. 주님의 놀라운 업적을 위한 찬양은 성찬 제정에서 자신의 성사적 요약을 인식한다. 주님께서 창조와 구원역사에서 사람들을 위해 이루신 것은, 성찬제정 말씀의 성취인 그리스도의 몸과 피안에서 의미가 있게 되고 현존한다. 빵과 포도주의 축성에서 주님의 놀라운 업적의 활동에 현재화하고 삽입하도록 기원했던 성령의 부름은 제정 말씀으로 성취된다. 이 말씀은 약속의 확증이며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현존, 십자가에 처형되고 부활하신 아드님의 인격이 실제로 현존하심으로서 의미있는 것이다. 성체성사 제정 때 그리스도 자신의 이 말씀은 성령 안에서 효력있는 약속이다. 감사행위로 교회는 아버지께 성령의 선물을 청하여 성령께서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고 아드님의 말씀을 현실화하고 효과있게 한다. 이 동일한 말씀은 교회가 성취되도록 기대한다: 아버지께서는 성령을 선사하시고 아드님의 말씀은 그 말씀이 의미하는 것인 그리스도의 성사적 현존, 그리스도의 감사드려진 몸과 피를 완성한다. 아버지께 감사드리며 성령을 부르고 “이는 내 몸... 이는 내 피의 잔이다...”라는 아드님의 말씀과 더불어 성사적 그리스도의 몸은 현실화된다. 십자가에 처형되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위격적으로 신비 안에 현존하신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하느님 나라는 그리스도와 함께 현존한다. 신비 안에 그리스도와 나라의 이러한 성사적 현존은 교회를 위해 창조와 구원 역사의 놀라운 모든 업적을 요약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사로 그분의 궁극적인 현존을 교회는 신비 안에 이미 인식한다. 교회는 자신 속에 숨어있는 나라의 기쁨으로 살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선포할 수 있다. “신앙의 신비여, 주 예수님 주님의 죽음을 선포하고, 주님의 부활을 거행하며, 영광 안에 주님께서 오심을 기다리나이다.” 비교 성찬제정 기사를 도입하는 것은 상당히 다양하다. 아나포라 제3양식은 성 바울로의 서간에 따라 “주님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1고린 11,23)라고 하는 반면, 제2양식은 히뽈리뚜스의 사도전승을 따르지만 “스스로 원하신 수난이 다가오자”라고 하면서 그것을 단순화한다. 아나포라 제4양식은 “때” (hora)와 십자가의 “현양” (glorificatio) (요한 13,1; 17,1)을 언급하면서 요한 전승에서 그 영감을 받았다. 더 나아가 성 요한의 동일한 본문을 그대로 인용한다: “예수께서는 그동안 세상에서 사랑해 온 당신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요한 13,1). 이러한 가장 아름다운 도입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 자신을 봉헌한 아가페의 운동에 성찬제정 기사를 연결시킨다. 신약성서에 따라 다시 만들어진 성찬제정 본문을 취급하지 않을 것이다. 잘 알려진 수많은 주석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신약성서에 나오는 네 개의 제정기사 가운데 한 가지에서 성찬제정 기사를 취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대답은 아주 단순하다. 사실 성서 그대로 성찬제정기사를 취한 아나포라는 하나도 없다. "성찬례는 복음사가와 바울로가 성서를 집필하기 전에 이미 오랫동안 거행되어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사실에서 성서 본문들 사이에 왜 성찬 제정문이 서로 다른가가 설명된다. 우리들은 이것에서 첫 세대 그리스도인들의 전례생활의 한 단면을 보게된다.“ 현행 미사전례서에는 “너희는 나를 기념하여 이를 행하여라”(Hoc facite in meam commemorationem)고 되어있다. 그러나 MR 1570에는 “In mei memoriam facietis”(나를 기억하여 하시오)라고 했다. 현행 성찬 제정문은 신약성서에 따라 memoria (기억)를 commemoratio (기념)으로 바꾸었다. 의도는 단순한 기억인 memoria에 대한 너무나 주관적인 해석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commemoratio라는 말은 더욱 객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기념” (memoriale)으로 우리가 표현한 그리스말 anamnesis 또는 히브리말 zikkaron의 번역이다. 성체와 성혈의 거양을 살펴보자. 현행 성찬례에서는 성체와 성작을 드는 동작을 성찬 제정문에서와 마침 영광송에서 세 번 한다. 그런데 OR I에서는 마침 영광송에서만 성체와 성작을 들어올린다. 사실 신자들 대부분은 성찬 제정문 중에 빵과 성작을 들어올리는 것에만 관심을 집중한다. 이 때문에 마침 영광송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의 중요성이 감소된다고 생각한다. 사실 성찬 제정문 중에 들어올리는 동작은 중세 때 성체 신심이 발전하여 신자들이 성체와 성혈을 보고자 하는 원의에 부흥하여 생긴 결과일 것이다. 성체 축성 중에 빵을 들어올리는 동작이 처음으로 나타난 곳은 쉴리의 대주교 오도 (1196-1208) 또는 느무르의 베드로 시대의 프랑스 파리에서이다. 이 동작은 여러 곳으로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반면 성체 거양 다음에 성작을 들어올리는 동작은 13세기 프랑스에서 시작되었지만 비교적 느리게 전파되었다. 공적으로는 1280년의 추기경 서임 예식서에서 성체와 성작의 거양이 언급되었음을 볼 때에 로마 전례에 이 동작이 확고히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MR 1570에서 전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규정되었다. 오늘날의 이중 거양과 흠숭은 라틴 교회에서 공통적 원리에 따라 주님의 말씀으로 구현되는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신앙과 흠숭의 행위인 것이다. 세 아나포라에서 성찬제정 말씀은 전례 집회의 환호가 뒤따른다. 이 환호는 감사기도의 중심 순간을 강조하며 첫째 부분을 완성한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 환호는 주된 두 개의 순간인 수난과 부활, 곧 파스카 신비를 언급함으로써 구원 역사에 대하여 감사드림을 확증한다. 환호는 성찬 거행을 종말론적인 관점으로 향하게 한다. 즉, 주님께 대한 기념이 향하는 궁극적인 지향은 영광 중에 주님의 오심과 하느님 나라의 현현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성찬례는 교회가 이 나라에 미리 참여하고 이 나라를 미리 맛보도록 선사한다. 이미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비슷한 전례 환호를 노래했었다: “마라나 타 (주님, 오소서)” (1고린 16,22). 또한 묵시록에서도 이러한 초기 전례문을 반영한다: “영과 신부가 ‘오소서’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는 이도 ‘오소서!’ 하고 외치시오”...“아멘, 오소서, 주님 예수님!” (묵시 22,17.20). [출처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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