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빚을 지고 사는 나 (마르12,13-17) *반영억신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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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 | 작성일2011-03-08 | 조회수594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연중 9주간 화요일 (마르12,13-17) 빚을 지고 사는 나 국가경영에 있어서 세금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권력자들은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여 더 많은 사업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세금을 내야 하는 많은 국민은 어떻게 하면 적게 낼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부자들의 감세 문제와 보편복지 문제의 충돌도 심각합니다. 생색내기에 돈을 퍼붓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관심도 두지 않거나 거짓으로 일관하는 현실이 가슴 아프게 합니다. 사실 어느 사회에서나 세금 문제는 골칫거리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고, 그래서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했는데 식민지 체제의 이스라엘에서는 주 하느님만을 유일한 왕으로 인정하는 그들의 신앙과 결부되어 더욱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들에게 세금은 곧 로마의 법에 복종해야 하는가? 하느님의 법을 좇아야 하는가의 문제였습니다. 선민의식을 지닌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은 납세를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유혈 진압되고 말았고, 그 후 억지로 세금을 냈습니다. 그러나 각자의 처지나 주장은 아주 달랐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납세를 로마의 노예를 드러내는 혐오스런 짓이며 유일하신 이스라엘의 주님이신 주 하느님께 불충하는 짓으로 여겼으나 현실적으로 마지못해 이행하였습니다. 반면에 로마에 의지하고 있는 헤로데 당원들은 당연히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납부하여 로마의 평화와 안정을 누려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실로 납세는 민중 정서와 로마권력이라는 양날을 지닌 날카로운 칼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은 아첨을 하면서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마르12,14) 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는 어느 쪽을 선택하여도 예수님은 다치게 되어있는 물음이었습니다. “세금을 내라”고 하면 민족주의자들인 군중을 실망케 하고 분노하게 할 것이며 “내지 말라” 고 말한다면 로마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처벌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길입니다. 은화의 한쪽에는 황제의 흉상과 “티베리우스 황제, 신적인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아우구스투스” 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고 다른 쪽에는 황제의 또 다른 존칭 “대사제”라는 명문과 황제 어머니 초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초상 만드는 일 자체를 우상숭배로 여겼고, 오직 하느님만을 신으로 받들었기에 데나리온에 새겨진 흉상과 초상, “신적인”이란 글자를 혐오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데니리온을 보여 달라 하시고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12,17)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돌려주라는 말은 빚을 갚거나 배상금을 지불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국가라는 공동선을 위해 세금을 납부하라는 말씀입니다. 세금 바치는 것을 신앙의 핵심처럼 비화해 요란 떨지 말고, 그가 만든 은화는 그에게 돌려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으니 모든 사람은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하느님의 초상이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할 빚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전 존재를 하느님께 바쳐야 합니다. 황제에게는 그저 돈만 바치면 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을 바쳐야 합니다. 그것이 관건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은 자기 속을 숨긴 채 올가미를 씌우려 했지만 속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황제도 결국 하느님의 피조물이므로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 하느님께 충성을 드려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셨습니다. 우리의 생애에서 물질의 세금보다도 하느님께 드려야 할 세금, 기도와 희생의 봉헌, 사랑의 실천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내 존재를 비롯하여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기꺼이 돌려드림으로써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감곡성당 반영억신부님 복음묵상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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