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느님 중심의 삶" - 3.8,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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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11-03-08 | 조회수502 | 추천수8 | 반대(0) 신고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1.3.8 연중 제9주간 화요일 토빗2,9-14 마르1,13-17
"하느님 중심의 삶"
대부분의 불행은 무지의 어둠에서 기인합니다. 무지로 인한 오해, 착각, 환상입니다. 깨달음의 지혜, 분별의 지혜로 밝아질 때 무지로 인해 파생됐던 문제들은 저절로 해결이 아니라 해소됩니다. 분별의 지혜는 분별의 눈, 깨달음의 지혜는 깨달음의 눈입니다. ‘깨달을 각(覺)’자 안에 ‘볼 견(見)자’ 눈이 들어있음이 의미심장합니다. 지혜와 눈은 직결됨을 봅니다. 제대로 보지 못해 편견과 선입견입니다. 제대로 보는, 넓고 깊은 시야와 안목을 지닌 이가 진정 현자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이 깊어질 때 보는 눈도 더욱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하느님의 눈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탐욕에 눈멀어 가면서 하느님의 눈을 잃어감으로 파생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온갖 문제들입니다. 하여 교육의 궁극 목적도 이런 ‘볼 눈’을 갖게 해주는 것, 즉 하느님의 눈을 지니게 해주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눈 없는 지식 축적의 교육이 아니라 눈 밝게 해주는 하느님 중심의 지혜 공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지혜가 참 놀랍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할 때 선사되는 이런 천상적 지혜요, 하여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진지한 물음 같지만 양자택일을 요하는, 이래저래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세금을 바치라하면 민족반역자요 세금을 바치지 말라하면 국사범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시야는 아주 좁습니다. 하느님의 눈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이를 예리하게 간파하신 주님의 역습입니다. 황제의 초상이 있는 데나리온 한 닢을 들이대며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물으신 뒤 ‘황제의 것입니다.’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일언지하에 답을 주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었습니다. 저들의 시야를 넓혀 부수적인 것에서 본질적인 것에로 시선을 돌리게 합니다. 데나리온 한 닢에는 황제의 초상이 새겨져 있지만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눈으로 하늘과 땅을, 전체와 부분을 보라 하십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이 확고하다면 세금 바치고 안 바치고는 저절로 답이 나올 것입니다. 여기서 정교분리의 원칙을 찾는 것도 어불성설입니다. 정치는, 황제는 물론 세상 모두가 하느님의 것이고 하느님께 속해 있는데 어찌 하느님에게서 분리해낼 수가 있겠습니까? 분별의 잣대는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가입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좋지 않은 정치라면 선의의 충고를 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게 예언자의 역할이며 이 역할을 소홀히 함은 직무유기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에 영광 받으소서.”
분도회의 모토대로 이 세상 모든 일의 잣대는 하느님의 영광임을 깨닫습니다. 살아있는 하느님의 영광인 사람이기에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선사되는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1독서의 토빗 역시 늘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았던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새 똥이 눈에 떨어져 실명했지만 하느님께 대한 추호의 불평이나 불만, 원망이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의 그 자선들로, 그 선행들로 얻은 게 뭐죠? 그것으로 당신이 무엇을 얻었는지 다들 알고 있어요.’라는 부인의 힐책에 침묵의 지혜로 대답하는 의인 토빗입니다. 화답송 후렴이 그대로 토빗에 대한 묘사 같습니다.
“의로운 마음은 굳게 주님을 신뢰하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마음을 다해 당신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지혜의 눈’을 선사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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