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자께서 사람이 되셨으니 2004년 새해가 밝았다. 그러나 교회 전례에서는 새해를 기념하는 어떤 예식도 없다. 그 이유는 대림으로 이미 교회의 새해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1월1일에 성탄 팔일축제 가운데 하나인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낸다. 사실 신자이든 아니든 많은 사람들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12월25일로 끝나는 줄 안다. 그러나 성탄 사건은 단 하루로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결코 하루로 끝날 수 없는 더 깊고 더 넓은 신비이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이 놀라운 강생의 신비를 우리 안에 더 깊이 새기기 위해, 성탄에 앞서 준비기간 (대림시기)을 마련했고, 성탄 이후에는 팔일축제와 공현 대축일과 더불어 주님 세례 축일까지 강생의 신비를 확장해서 경축한다. 우리 수도원에서는 12월24일에서 25일로 넘어가는 밤, 성탄 밤기도와 밤미사를 알리는 종이 울리면, 수도 형제들은 수도원 성당으로 들어가는 복도에 나이 많은 형제부터 적은 형제까지 줄을 선다. 하느님의 위대한 신비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 형제들은 내적 침묵으로 마음을 가다듬는다. 이제 천천히 행렬하여 빛으로 가득 찬 성당으로 들어간다. 왜 우리는 성당에 함께 모이는가. 그것은 우리가 세례와 견진의 은총을 통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로 불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1베드 2,9-10; 묵시 1,6; 20,6 참조). 하느님을 섬기는 첫째 방법은 기도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은 홀로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기도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기도하는 공동체인 교회에 소속된 한 지체로서 더불어 기도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본성적으로 전례 공동체다. 그렇지만 우리 인간의 힘만으로는 기도할 수 없다. 하느님께서 당신 성령을 통하여 우리 입술을 열어주셔야지 기도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밤기도를 시작하면서 아빠스님이 입술에 십자가를 그으면서 “주님, 제 입시울을 열어주소서” 하고 주님께 간구하고, 다른 형제들은 “제 입이 당신 찬미를 전하오리다” (시편 51,17) 하고 응답한다. 이것은 주님께 찬미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마음을 열어주시라고 탄원하는 것이다. 드디어 성가대의 선창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나셨으니, 어서 와 조배 드리세” 하고 초대송 후렴을 통하여 이 아기의 탄생을 환호한다. 그렇다, 이 갓난아기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우리를 위하여 태어날 한 아기, 우리에게 주시는 아드님, 그 어깨에는 주권이 메어지겠고, 그 이름은 놀라운 의견의 사자라 일컬어지는” (이사 9,5 참조; 성탄 대축일 낮미사 입당송) 분이시고, “오늘 다윗의 고을에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곧 주님 그리스도이시오” (루가 2,11; 밤미사 복음) 라고 천사가 알려준 그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시편의 시인을 통해 당신 아드님의 탄생을 말씀하셨다. “나에게 이르시는 주님의 말씀, ‘너는 내 아들, 오늘 너를 낳았노라’” (시편 2,7; 성탄 밤기도의 후렴). 2000년 전 ‘과거’에는 베들레헴에서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근방에서 밤새 양떼를 지키고 있던 목자들만이 아기의 탄생을 지켜봤다 (루가 2,1-20). 그러나 ‘오늘’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가 아드님의 탄생을 경축한다. 시편이 말하는 “오늘” (hodie)이 바로 우리가 성탄 전례를 거행하는 “오늘”이다. 우리가 성탄의 신비를 거행하는 “오늘”, 베들레헴이 아닌 우리가 모인 이 성당에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탄생하신다. 이것이 전례의 신비다. 전례를 거행할 때 과거에 일어났던 구원 사건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오늘 여기서 재현되는 것이다. 전례를 통하여 바로 오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태어나시게 한다. 그런데 우리는 성탄 전례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강생의 신비만을 경축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성탄 대축일 낮미사 본기도에서 사제의 입을 통해 “인간에게 고귀한 품위를 주시고 더욱 새롭게 창조하신 하느님, 성자께서 사람이 되셨으니, 저희도 하느님이신 성자를 닮게 하소서” 하고 기도한다. 본기도는 구원역사 전체에서 성탄의 신비를 바라보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우선 성탄의 신비를 하느님의 창조 사업과 직접 연결시킨다. 본기도는 “인간에게 고귀한 품위를 주셨다”고 고백하면서 첫 창조 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셨으며, 특히 사람을 당신 모상으로 창조하심으로써 (창세 1,1-2,4) 인간의 본성 (natura)을 품위 (dignitas)있게 하셨음을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께 거역하는 죄를 지음으로써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죽음의 운명에 처했다 (창세 3,1-24).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때가 차차 당신 아드님을 보내셨으며, 한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갈라 4,4) 하심으로써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신다. 본기도는 “인간을 더욱 새롭게 창조하셨다”고 확증하면서, 강생의 신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완성되는 파스카 사건을 내다본다. 그래서 바울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몸을 당신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필립 3,21)라고 힘주어 말했던 것이다. 따라서 성탄의 신비는 새로운 창조인 파스카 신비를 미리 선포하고 준비하는 역할을 한다. 더 나아가 본기도에서 기념과 염원, 역사와 역사를 초월하는 우리의 근원적인 희망이 서로 만난다. “성자께서 사람이 되셨으니, 저희도 하느님이신 성자를 닮게 하소서.” 사실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 안에서 하느님을 우리와 멀리 떨어진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하느님으로 알게 되었다 (마태 2,23).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탄생을 준비하는 대림시기부터 “오, 임마누엘, 오시어 저희를 구원하소서. 우리 주 하느님” (12월23일 저녁기도 성모의 노래 후렴)라고 기도하면서 주님의 오심을 고대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만이 아니시다. 성탄에서 우리는 우리의 인성을 취하신 하느님을 기념하고, 동시에 우리의 인성이 당신의 천주성에 참여하도록 원하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경축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품위를 다시 되돌려주셨고 다시 올려주셨다. 우리는 강생의 신비를 통하여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되었다” (2베드 1,4). 사실 본기도 전체는 레오 대종의 성탄 강론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오, 그리스도인 여러분, 여러분의 고귀함을 의식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았습니다” (성탄 강론 21,3). 그렇다, 성탄 전례를 통해서 우리는 인성을 취하신 하느님 안에서 우리 자신의 고귀함과 품위를 다시 보게 된다. 그래서 증거자 막시무스는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만큼 사람은 하느님이 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탄생 안에서 우리 각자를 영원한 생명으로 태어나게 하시기 때문이다. 성탄 전례는 새로운 인간성의 탄생을 경축하는 우리의 생일잔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오늘 하느님께서 “어둠 속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루가 2,79) 비천한 우리를 찾아오셨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자비하심 덕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새기신” (루가 2,19;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복음) 마리아와 함께 “내 혼이 주님을 기리고 내 영이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반겨 신명 났거니, 정녕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도다” (루가 1,46-48)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하느님의 놀라운 자비와 은총에 감사하는 사람은 “나는 살아있지만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십니다” (갈라 2,20)고 말하는 사람이 아닐까. 우리 모두 천사들과 함께 2004년 내내 노래하자.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루가2,14; 대영광송). [성서와함께, 2004년 1월호, 인 끌레멘스 신부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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