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수도원 창문을 흔들 정도로 부는 바람이 앙상한 나뭇가지를 스쳐 우리에게 와 닿으면 아직도 차기만 하다. 그렇게 매서운 겨울바람에도 생명을 움트게 하는 봄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우리 마음이 이미 봄으로 넘어가는 문턱에서 희망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안배하신 계절의 흐름에 따라 교회도 참으로 은혜로운 때를 준비하는 시기인 사순절에 들어간다. 사순절은 라틴말로 Quadragesima라 하는데, 이 말은 ‘40일’이란 말에서 나왔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면서 하느님 백성으로 태어났으며, 엘리야가 호렙 산에서 40일 동안 단식과 기도를 하며 하느님을 만날 준비를 했고,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다음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서 기도와 단식을 하시고 악마의 유혹을 이기시면서 공생활을 준비하셨다. 이처럼 성서에서 40이란 상징적 숫자는 궁극적인 구원을 준비하는 기간을 뜻한다. 이러한 성서적 배경을 토대로 하여 교회에서도 전례주년 가운데 가장 큰 축제인 파스카를 준비하는 기간을 40일로 정했다. 사순절 하면 금요일마다 힘든 금식과 금육을 지키고 십자가의 길을 바치며 미사 때 사제는 자색 제의를 입고 대영광송과 알렐루야를 부르지 않는 것을 우선 떠올린다. 그렇지만 전례 예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사순 시기의 시작을 알리는 재의 수요일 미사 중에 재를 머리에 받는 예식이 아닐까? 내가 로마에서 공부할 때 교황님이 집전하시는 재의 수요일 미사에 참례했다. 로마 교회에서는 오래 전부터 빨라띠노 언덕에 있는 성녀 사비나 대성당에서 교황님이 재의 수요일 미사를 거행하신다. 내가 있던 베네딕도회 성 안셀모 수도원이 성녀 사비나 대성당과 매우 가까이 있기 때문에 해마다 이 대성당에서 교황님이 집전하는 재의 수요일 미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성 안셀모 수도원 성당에서 교황님은 자색 제의로 갈아입으시고 시작 예식을 하신 다음, 베네딕도회 수도자들과 도미니꼬회 수도자들과 함께 행렬하여 성녀 사비나 대성당으로 가서 미사를 거행하신다 (성녀 사비나 대성당은 성 도미니꼬회의 총원이다). 교황님 앞에 무릎을 꿇으니 교황님은 떨리는 손으로 내 머리에 재를 얹으시면서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창세 3,19 참조) 하신다. 그런데 재는 어떤 뜻으로 재의 수요일 전례에서 사용되는가. 사람의 마음은 눈에 안 보인다. 우리가 감사의 마음을 선물에 담아 다른 이에게 표현하듯이, 전례에서도 우리의 마음을 물질적인 표지를 통해 하느님께 드러낸다. 이것을 전례의 육체성(肉體性)이라고 부른다. 이 표지가 담고 있는 속뜻은 성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성서에서 재, 티끌, 흙은 다 같은 말이다. 무엇보다 우리의 나약성과 죽을 우리의 운명을 상징한다. 이 상징은 이미 성서의 첫 번째 책에서 드러난다.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셨다” (창세 2,7). 이것이 “아담”이라는 이름의 뜻이다. 그래서 “인간은 한 줌의 흙과 재에 불과한” (집회 17,32) 존재이고 끝내는 자신이 왔던 근원으로 돌아간다. “다 같은 데로 가는 것을! 다 티끌에서 왔다가 티끌로 돌아가는 것을!” (전도 3,20). “얼을 거두시면, 그들은 숨져버려 드디어 티끌로 돌아가고 마나이다” (시편 103,29).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 주민들을 위해 하느님께 간청하면서 자신의 연약함을 솔직히 드러낸다. “티끌이나 재만도 못한 주제에 감히 아룁니다” (창세 18,27). 이런 여러 가지 성서에서 확인되듯 우리의 창조주 하느님께 우리 존재는 재와 같이 미미함을 고백하고 있다. 우리의 나약성을 표현하는 재는 자연스럽게 또 다른 상징에 연결된다. 곧 재계와 회개의 상징이다. 사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악 때문에 우리는 슬픔을 느끼고, 파스카를 향해 가는 여정에서 우리가 이 악에서 해방되기를 바란다. 우리의 희망이 구체화되는 것이 바로 회개이다. 연약한 우리이지만 실상 우리는 죄인들이다. 재를 머리에 얹는 예식에 앞서 말씀 전례에서 우리는 회개하라는 하느님의 급박한 요청을 듣는다 (요엘 2; 2고린 5; 마태 6). 이날 독서의 메시지는 진심으로 뉘우쳐 하느님께 돌아와서 (요엘 2,12) 하느님과 화해하라는 것이다 (2고린 5,20). 이것은 우리가 모두 경험하는 “악의 세력과 맞서 싸우기를” (본기도) 시작하는 것이다. 성서에서 재는 참회하는 사람이 자신의 내적인 자세를 밖으로 드러내는 상징적 동작이다. 우선 비보를 전해주는 사람이 옷을 찢고 머리에 흙을 뒤집어썼다 (엘리의 아들들이 죽었다는 소식: 1사무 4,12;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 2사무 1,2). 이것은 재앙을 앞에 둔 사람의 전형적인 동작이다. 동족을 죽이려는 “이 모든 일을 알게 되자 모르드개는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걸치고 재를 뒤집어 쓴 채 대성통곡하며 거리를 지나갔다” (에스 4,1).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옷을 찢고 머리에 먼지를 쓴 채 저물 때까지 주님의 궤 앞에 엎드려 있었다” (여호 7,6). “내 딸 내 백성아, 상복을 입고 재를 뒤집어 서 보려무나” (예레 6,26). 이러한 재앙 앞에 사람은 참회를 한다.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 (욥 42,6). 요나의 설교로 회개한 니느웨 주민들의 본보기는 전형적이다. 그들은 “하느님을 믿고 단식을 선포하였다. 모두 굵은 베옷을 입고 단식하게 되었다. 니느웨 임금도... 잿더미 위에 앉아 단식하였다” (요나 3,5-6). 그리고 재는 구원을 간청 드리는 우리 자신이 하느님께 애원하는 기도의 표현이다. 유딧은 이스라엘 백성을 주님께서 해방하시도록 청한다. “유딧은 땅에 엎드려 머리에 재를 뿌리고 속에 입고 있던 베옷을 드러냈다... 주님을 향하여 큰 소리로 기도하였다” (유딧 9,1). 백성도 주님 앞에 엎드렸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아이들까지도 성전 앞에 엎드렸고 머리 위에 재를 뿌리며 주님 앞에 베옷을 펼쳐 깔았다” (유딧 4,11). 그러나 재를 얹는 것이 순전히 죽음과 우리의 타락과 죄를 기억하고 신음하는 동작만이 아니다. 사순시기에 우리가 시작하는 여정은 파스카적인 여정이다. 우리는 생명으로 불림을 받았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았다. 티끌에서 온 우리는 다시 티끌로 돌아갈 것이지만, 이것이 우리의 역사도 우리의 운명도 아니다. 사순 시기를 개막하면서 우리 머리에 얹는 재는 새 생명으로 일으켜지는 부활의 재이다. 진흙으로 지은 아담이 하느님의 입김으로 살아있는 존재가 된 것처럼 (창세 2,7), 우리의 진흙도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성령의 힘을 통해 파스카로 이루어진 생명에 참여할 것이다 (로마 8,11). 그래서 사순절은 ‘파스카의 성사’, 다시 말해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죄에서 구원으로 건너가는 새로운 출애굽에 대한 교육적이고 효과적인 표지가 된다. 이러한 건너감의 여정이 재의 수요일과 파스카 밤에서 잘 드러난다. 재를 머리에 받으면서 시작되는 사순절은 부활 성야 미사의 세례 예식으로 끝맺는다. 이 두 예식은 역동적인 일치성을 표현한다. 재는 우리를 더럽히지만 물은 우리를 깨끗이 씻긴다. 재는 파괴와 죽음을 말한다. 파스카 밤의 물은 생명의 원천이다 (민수 19; 히브 9,13 참조). 이처럼 정화와 성화의 시기인 사순절의 출발점인 재의 예식에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죄를 기억함으로써, 부활 밤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부활에 우리를 합치시키시고 세례의 물로 우리를 정화시키시도록 기도한다. 사순절의 영적 투쟁은 이미 이겨놓고 하는 싸움이다. 그래서 성 바울로는 재의 수요일 미사에서 우리에게 힘주어 말한다. 오늘이 “알맞은 때입니다. 보시오,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 (재의 수요일 제2독서). [성서와함께, 2004년 2월호, 인 끌레멘스 신부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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