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말씀을 듣는 공동체 이 글을 쓰고 있는 요즘, 산과 들은 봄 가뭄으로 메마른 숨을 내쉬고 있다. 때마침 오늘 오후 늦게부터 반가운 비가 내리고 있다. 성모 찬송가 “Regina caeli laetare alleluia”를 끝으로 시간전례 끝기도를 마치고 어둠이 내려깔린 정원으로 나가니 빗소리가 시원스레 내린다. 문뜩 비를 맞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빗속을 걸으면서 여러 가지 일로 갈라진 마음을 추스르니 한결 넉넉해지고 부드러워지는 것 같다. 내일 눈을 뜨면 보잘것없는 물방울이 온 누리에 생명을 움트게 할 것이다. 비는 단순히 한 물방울이 아니라 생명을 가능케 하는 원천이다. 특히 척박한 땅이 많은 중동 지역에서 비는 소중하고 귀중한 것이고 목숨과 같은 것이었다. 이사야 예언자는 놀라운 생명력을 지닌 하느님 말씀을 하늘에서 내리는 비로 비유했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이사 55,10-11). 산천초목만이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도 살아가면서 단비를 목말라하는 내면의 뜨거운 숨소리를 듣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단비를 내려 줄 대상을 찾아 이곳저곳을 방황하기도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내면의 목마름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 하느님이심을 안다. 그래서 ‘하느님을 위해 자신을 비워두는 시간’, ‘하느님을 위해 자유로운 시간’ (vacare Deo)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 내면의 빈 자리에 하느님은 당신 말씀을 새벽이슬처럼 촉촉이 내려주신다. 생명의 말씀을 문자로 담고 있는 책이 바로 성서이다. 오래 전부터 한국 교회에서는 평신도들이 주축이 되어 다양한 형태로 열심히 성서 연구 모임을 하고, 또 최근에는 성서로 기도하는 방법인 렉시오 디비나 (Lectio divina 聖讀)에 관한 관심도 일어나고 있다. 그렇지만 성서 모임에 열심히 참가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서가 전례와 매우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은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고, 성서와 전례가 서로 따로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믿는 이들의 모임인 교회는 무엇보다 먼저 ‘기도하는 교회’ (Ecclesia orans)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친밀하고도 영적인 대화이다. 교회가 기도할 때 하느님은 당신 말씀을 건네주시고 공동체는 이 말씀에 응답한다. 이렇게 하느님과 대화를 통하여 기도하는 교회는 ‘하느님 말씀을 듣는 공동체’로 자신의 본질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교회는 하느님을 흠숭하고 예배드리기 위해 모일 때, 다시 말해서 전례를 거행할 때 하느님의 말씀을 함께 경청하고 함께 응답한다. “하느님과 인간의 중개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성령 안에서 맺은 새로운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피를 흘리심으로써 단 한번 모든 시간에 대하여 드린 바로 그 ‘아멘’을 교회 또한 전례 행위 안에서 충실하게 응답한다 (2고린 1,20-22 참조). 하느님께서 당신 말씀을 건네실 때는 언제나 응답을 기대하신다. 그 응답은 들음이면서 ‘성령과 진리’ (요한 4, 23) 안에서 드리는 흠숭이 될 때 가능하다” (미사전례성서 총지침 6). 히브리인의 전통과 마찬가지로 (느헤 8), 우리 그리스도인의 전통에 따라 (참조 루가 4,16-21) 죽은 문자로 기록된 성서(Sacra scriptura)는 전례 행위 가운데 하나인 ‘선포’ (proclamatio)를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 (Verbum Dei)으로 변하고, 선포되는 이 말씀은 ‘지금 그리고 여기서’ (hic et nunc) 신자들 안에서 힘 있고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이 된다. 사실 교회는 기도와 성사적 표징 안에서 말씀을 듣고, 말씀을 선포하고, 말씀을 해설하고, 말씀을 해석하고 그리고 말씀을 살아있고 활력 있게 함으로써 말씀을 거행한다. 이러한 하느님 말씀의 거행은 특히 성찬례에서 ‘말씀 전례’ (liturgia verbi)를 거행을 할 때 참다운 모습을 드러낸다. 미사의 시작 예식 (입당송-본기도)은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로 되어 있는 미사 전체의 준비로서, 말씀과 성사 안으로 하느님께서 오시는 것과 활동하시는 것을 예비한다. 그런데 구조상으로 볼 때 시작 예식은 본성적으로 또 직접적으로 하느님 말씀의 거행을 도입한다고 말할 수 있다. 회중이 자리에 앉은 후 모든 이가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주님의 말씀이 독서대에서 선포된다. 말씀 전례의 중심은 제대가 아니라 독서대이다. 말씀 전례의 중심 부분은 성서에서 취한 독서들과 그 사이에 오는 노래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강론, 신앙 고백 및 보편지향기도는 이 중심 부분을 발전시키고 끝맺는다 (미사전례서 총지침 55). 말씀 전례는 하느님과의 대화인 기도처럼 대화형식으로 이루어진 구조인데, 이것을 주일 미사를 기준으로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도표는 '성서와 함께 6월호' 참조 말씀 전례에서 그 첫 자리는 하느님 말씀이다. “맨 처음 말씀이 계셨다.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요한 1,1). 하느님 말씀이 세상을 창조하신다 (요한 1장 참조). 하느님 자신이 현존하시고 선포하시고 구원의 메시지를 완성하신다. 따라서 말씀 전례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인간의 기도가 아니라 활동하시는 하느님 말씀이시다. 그래서 성서 봉독 끝에 독서자는 “주님의 말씀입니다”하고 확인한다. 아담과 그 자손한테서 시작하여 새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과 더불어 단 한번 일어난 구원사건이 교회 안에서 지금 새롭게 완성되는 것이다. 회개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이 새롭게 울러 퍼지고, 은총과 자비의 말씀이 새롭게 선포된다. 율법과 예언자의 말씀인 구약독서, 그리고 사도들의 가르침으로 이루어진 서간독서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인간과 만나신다 (루가 24,25-27 참조). 사제나 부제의 복음 선포를 통하여 살아계신 말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현존하시고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전례헌장 7). 강론 역시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는 전례 행위에 포함된다. 이는 말씀에 대한 해석이고 예언적 선포로서, 성서에 기반을 둔 복음 선포적 강론이다. 강론을 통하여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의 자리에 새롭게 육화되신다. 이제 우리 인간은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는 백성으로서 교회 공동체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는 믿는 이들의 집회다. 이처럼 들으려고 하는 우리의 태도는 하느님의 말씀을 내면화하고, 말씀의 형태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앞에 자신을 두기 위해 필수적이다. 이 말씀에서 출발하여 이 말씀을 내면화하는 전례 행위로서 화답송과 복음 전 노래를 통하여 우리는 경청한 말씀에 응답하고, 신앙고백과 보편지향기도로 그 말씀에 결합된다. 말씀 전례의 대화적 구조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관한 매우 심오한 믿음의 시각을 드러낸다. 곧 하느님 홀로 인간 구원을 시작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신앙은 들음에서 나온다 (fides ex auditu). “믿음은 들음에서 비롯하고 들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합니다” (로마 10,17). 선포되는 말씀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전례 안에서 응답하고, 더 나아가 구체적 삶으로 그것에 결합하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샘이 되고 거기서 물이 솟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입니다” (요한 4,14). [성서와함께, 2004년 6월호, 인 끌레멘스 신부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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