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강림 대축일의 역사와 의미
세상을 향한 복음선포의 시작 - 예수가 부활한 후 50일째 되는 날 성령이 사도들에게 내려옴으로써 사도들은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가톨릭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그림은 베첼리오 티치아노의 ‘성령강림’, 1570년경, 유화, 구원의 성모성당, 베네치아.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사도 2,1-4) 예수가 부활한 후 50일째 되는 날 성령이 사도들에게 강림한 사건은 교회가 설립되고 선교의 시대가 시작됨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두려움에 떨며 다락방에 숨어있던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만백성에게 선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회는 성령을 받아 주님의 증거자로 힘차게 복음을 선포했던 사도들을 이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계 만방에 선포하고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를 구현할 사명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강림대축일은 바로 이러한 성령강림의 사건과 그 의미를 기념하는 축일이다. 기원과 역사 성령강림대축일을 의미하는 라틴어 ‘펜테코스테스’(Pentecostes)는 ‘50번째’라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펜테코스테’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진다. 성령이 강림한 오순절은 본래 밀을 추수하여 그 첫 결실을 하느님께 바치고 감사제를 드리는 축제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축제를 이집트 탈출 사건을 기념하는 과월절 축제 후 50일이 지난 다음 거행했고, 그 의미에서 오순절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사도행전은 바로 이 오순절에 성령강림이 이뤄졌다고 전하고 있다. 성령강림으로 사도들이 여러 다른 언어로 말하게 되었고, 베드로는 설교를 통해 약 3000명을 개종시켜 세례를 받게 했다고 쓰고 있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함으로써 신약에서는 오순절이 성령강림과 같은 날이 되었다. 과월절이 예수의 부활을 뜻하는 것처럼, 과월절로부터 50일째가 되는 오순절은 예수 부활로부터 50일째에 성령이 강림한 성령강림절이 된 것이다. 성령의 이해 ‘하느님의 얼’ ‘숨결’ ‘바람’ ‘거룩한 영’ 등으로 표현되는 성령은 삼위 중 제3위로 제1위 성부, 제2위 성자와 같은 분이시며 영원으로부터 계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성령은 본성 면에서 성부 성자와 같으나, 성부 성자는 성령을 통해 일치하시며 성령은 하느님의 진리를 계시하신다는 것이다. 또 성령은 영적인 능력의 원천으로 영혼을 비추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견고케 하시고 위로하신다. 더불어 회개하는 자를 돕고 하느님 생명의 새로운 원리가 되어 그 안에 거처하신다고 교회는 가르친다. 성경 안에서 성령의 모습을 보면, 구약에서는 인간의 마음안에 진정한 평화와 화목을 일으켜 주시는 분, 지혜를 주시어 우주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분, 하느님 일꾼들에게 힘과 용기, 사랑을 주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한편 신약에서는 ‘파라클리토’, 즉 협조자, 보호자, 위로자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는 일에 관여하여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하도록 하였고 그 예수를 인도, 세상에서 그 동반자로 함께하고 있다.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도들은 예수님 복음의 산 증인이 되었고, 지금껏 교회는 예수님의 진리를 전파할 수 있는 은총을 이어받았다. 결국 성령강림은 오늘 이 시간에도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성령의 활동은 무엇보다 교회를 거룩하게 하고 하느님 백성의 믿음을 북돋아 주시는 것으로 규정된다. 교회와 신자들 마음을 성전 삼아 그 안에 거처하시고, 교회를 가르치시며 지도하고 아름답게 꾸미신다. 이를 통해 신자들은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고 교회는 밝히고 있다. 또 내적 도우심으로 신앙을 완성시키며 교회를 새롭게 하여 일치를 이루어 가도록 한다. 성령강림은 어느 특별한 날, 특별한 사건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태초에 활동하고 계셨고 구약의 현장과 예수님 탄생 과정에서도 깊이 속해 있었다. 그리고 현재에도 교회 안에 계시면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들어 주시어, 세상에 구원의 표징이 되도록 이끌어 주신다. [가톨릭신문, 2011년 6월 12일,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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