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전례 이야기 ‘전례 짬짜’] (31) 감실에 계신 성체
성체 안에서 늘 함께하시는 주님께 경배 요즘에는 성당에서 여러 가지 행사들을 많이 한다. 청소년들의 성탄제, 꾸리아의 연차총친목회, 성가대의 성가발표회 등을 전례공간인 제단에서 행한다. 물론 본당에 신자 전체가 들어갈 강당이 없기에 성당을 이용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 성체가 모셔져 있는 감실에 대한 경외심이 있는 지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예전에는 전례거행 이외의 행사가 있을 때는 사제가 와서 감실의 성체를 제의방에 따로 옮겨놓았다. 그래서 혹시 성체에 대한 불경의 행위에 대해서 미연에 방지를 했다. 그런데 요즈음은 사제들 사이에서도 “예수님도 이런 행사에 함께하시면 좋잖아!”라고 하면서 성체를 옮기지 않고 전례 외의 다른 행사들을 하는 것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우가 많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하다. 박해가 끝나고 한국 천주교회의 신자들은 성당에 감실을 배치하고 성체를 모시게 됐다. 성체를 매일 영하고 성체조배가 가능한 전례생활이 자유롭게 시작된 것이다. 매우 감격스러워했고 성체를 모신 감실이 있는 성당에서는 정숙했다. 이때의 상황을 「회장직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위의 글을 요약하면 모든 교우들이 우리와 함께 계신 큰 은혜인 성체를 소중히 여겨 성당과 경당에서는 침묵하고 단정히 지내고 성체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보고 계시니 항상 생활을 조심해 이를 의식해야 한다. 감실에 계심은 성체가 단순히 보관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의 하례를 받고자 하심이니 우리는 매일 부모님께 문안을 드리는 것처럼 조배할 것이며 경문만 염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과 대화하듯이 우리의 죄와 여러 감정까지도 자녀가 부모께 이야기하듯 대화해야 한다. 즉 감실 안에 계신 성체의 현존을 깊이 인식하고 조배하면 성체를 모셔놓는 중요한 전례공간임이 드러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 감실의 위치나 중요성이 어느 정도 감소한 것은 사실이다. 이는 더 중요시해야 하는 제대가 중세를 거치면서 홀대를 받았기에 그 중요성을 회복하면서 생긴 자연스런 결과다. 이는 중세에 성체의 실체변화(transsubstanstiatio)를 강조하면서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는 미사거행보다는 주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성체와 성혈을 더 중요시하면서 생긴 일이다. 라틴어로 진행되던 당시의 미사 거행에서 교우들은 방관자일 수밖에 없었고, 오히려 성체를 바라보며 그분의 현존을 느끼고 강복을 받는 것이 훨씬 쉽게 참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죄에 대한 깊은 성찰은 오히려 성체를 영하라는 교황님들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영성체를 멀리하게 하는 요인이 됐으며 성체를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게 했다. 이에 따라 성체에 계신 주님에 대한 신심이 강화돼 성시간과 성체현시, 성체강복이 생겼고 미사성제가 드려지는 제대는 감실 받침으로 전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미사성제와 성체, 제대와 감실은 대입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다만 우선순위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이러한 우선순위는 교회의 존재 이유를 잘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미사경본 총지침 27항은 교회의 기원을 미사에서 찾는다. “주님의 만찬인 미사에서 하느님의 백성은 그리스도를 대신해 사제가 주례하는 주님의 기념제인 성찬의 희생 제사를 거행하도록 함께 모이라고 부름을 받는다. 그러므로 거룩한 교회의 이러한 지역 모임에서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마태 18,20)고 하신 그리스도의 약속이 가장 뚜렷하게 실현된다.” 곧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는 주님의 기념제인 성찬의 희생 제사를 거행하도록 함께 모이라고 부름을 받으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희생 제사를 통해서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신다. 같은 항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실제로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재현하는 미사 거행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회중과 집전자의 인격과 당신 말씀 안에 실제로 현존하시며, 성찬의 형상들 아래 실체로서 계속해 현존하신다.” 주님은 회중, 집전자의 인격, 말씀, 성찬의 형상들인 성체와 성혈을 통해 계속 현존하신다고 교회는 선언한다. 성체와 성혈은 주님 현존의 한 형태이다. 성체와 성혈에만 현존하신다고 하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을 너무나 협조한 곳에 가두어놓는 것이다. 중세는 그런 경향이 강했다면 지금은 너무나 성체와 성혈에 계신 주님에 대해서 경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안타깝다. 우리는 감실에 모셔진 성체를 통해 늘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하신 ‘임마누엘’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의 사랑을 묵상할 수 있다. 소통의 현대 문명인 핸드폰과 인터넷이 발달했어도 늘 외로움에 잠겨 있는 현대의 교우들에게 감실에 계신 성체는 어떤 말이나 상황이든 다 들어주시고 위로해주시는 상담가이며 위로자라 하겠다. 그리고 이런 성체와의 친밀한 관계는 미사 거행에 참례함으로써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 [가톨릭신문, 2012년 4월 29일, 윤종식 · 허윤석 신부(가톨릭 전례학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