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승천대축일과 한국천주교회
한국교회, 형성 초기부터 성모신심 각별 8월 15일은 가톨릭교회 4대 축일 중 하나인 '성모 승천 대축일'이다. 이날 우리 민족은 일제 강점에서 해방됐고, 3년 뒤 같은 날 유엔 승인 아래 신생 대한민국이 탄생했다. 그래서 한국 천주교회는 민족의 해방과 우리나라 탄생을 '성모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있다. 광복절과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아 성모님과 한국 천주교회의 관계를 정리했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앙고백 - 한국 천주교회는 교회 형성 시기부터 성모 신심운동을 활발히 펼쳐왔다. 사진은 1954년 10월에 열린 성모성년 축하대회 중 신자들이 성모상을 앞세우고 행렬을 하고 있다. 구세주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은 초대 교회부터 신자들 사이에서 다양하게 발전해 왔다. 그 가운데 믿을교리로 반포된 내용을 정리하면 "성모 마리아는 1'원죄없이 잉태되신 분'으로 2성령으로 인하여 구세주를 낳아 기르셔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으나 3 '평생 동정녀'로 사셨고 4 생을 마친 다음 영혼 육신이 하느님의 불리움을 받아 '승천'하시어 5 예수 그리스도의 중개에 참여, 하느님과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인류의 중개자'가 되셨다" 고 요약할 수 있다. 성모 승천 교리의 핵심은 '마리아가 구원되었다'는 것이다. 마리아에게 이뤄진 구원은 인류가 가야할 길이고 목표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길 기도할 뿐 아니라 마리아의 중개를 믿고 성모께 전구하는 것이다. 구원의 표징으로 드러난 성모 승천은 하느님 은총으로 마리아가 어머니 뱃속에서 잉태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원죄와 모든 죄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분이셨기에 가능했다. 죄에서 해방되셨고 구세주를 낳으셨으나 평생 동정이셨다는 성모의 신원은 마리아 개인의 영광보다 예수님을 위한 깨끗한 모태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가 마리아를 거룩한 어머니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라고 부르며 '하느님의 어머니'로 고백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성모 마리아와 한국 천주교회 한국 천주교회는 교회 형성 시기부터 성모 공경을 통한 마리아 신심운동을 활발히 펼쳐오고 있다. 신자들은 「천주실의」 「성경직해광익」 「주교요지」 등 서학서를 통해 마리아께 대한 이해를 키웠고 묵주기도를 통해 성모 신심을 함양했다. 성모상과 묵주는 천주교의 상징이었다. 박해시대 관헌들은 통행이 잦은 도성 입구에 성모상과 묵주를 놓아두고 행인들에게 밟고 지나가게 해 신자들을 색출할 정도였다. 또 관헌에 체포된 신자들은 모진 고문에도 "예수 마리아"를 외치며 신앙을 증거했고, 순교 직전까지 손에서 묵주를 놓지 않았다. 김대건ㆍ최양업 신부도 성모신심이 탁월했다. 이들 두 신부는 '하느님 다음'으로 성모께 희망을 갖는다고 고백할 만큼 글을 쓰거나 배를 타고 항해할 때, 중국 대륙을 여행할 때나 위기가 닥칠 때도 성모께 깊이 의탁하고 보호를 청했다. 한국 천주교회 성모신심은 1831년 조선대목구 설정 이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더욱 확산됐다. 조선대목구는 놀랍게도 로마 성모 마리아 대성전에서 탄생했다. 유럽에서 최초로 성모 마리아께 봉헌된 이 성당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조선대목구 설정을 반포한 것이다. 조선 땅에 입국한 선교사들은 당시 프랑스에서 널리 확산되고 있던 성모신심 특히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께 대한 신심과 전통을 한국에 그대로 옮겨놓았다. 주교로서 이 땅에 첫 발을 내디딘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는 신자들의 성모신심을 칭송해 1838년 교황청에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조선교회 수호성인으로 청했고,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41년 8월 22일 이를 허락했다.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는 1846년 11월 2일 '죄인들의 회개를 위한 원죄없으신 성모 성심회'를 설립, 신자들의 성모신심 운동을 체계화ㆍ조직화했다. 한국 천주교회 마리아 신심 단체의 효시인 성모성심회 회원들은 매주 정기 모임에서 죄인의 회개를 위한 기도를 많이 바쳤다. 제4대 교구장 베르뇌 주교는 「천주성교공과」를 번역, 출간해 신자들의 성모신심을 더 고양시켰다. 이 기도서는 일상기도와 주일, 전례주년 내 성모축일에 바치는 기도문들을 수록해 놓은 것으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까지 전례 성모신심의 기도서이자 지도서 역할을 했다. 베르뇌 주교는 또 1861년 10월 조선 교회 전체를 8개 사목구로 정하고 성 요셉신학교를 제외한 7개 지역에 성모축일 이름을 붙여 신자들의 성모 마리아께 대한 신심과 덕행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혔다. 신앙 자유가 보장된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1898년 명동성당을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께 봉헌했다. 1950년 전후로 레지오 마리애, 파티마의 성모사도직(푸른군대), 성모의 기사회 등 성모신심 운동 및 사도직 활동이 도입됐고,'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교리 선포 100주년이 되던 1954년 한국 주교단은 성모 성년 대회를 개최하고 다시 한 번 한국교회를 성모 마리아께 공식적으로 봉헌했다. 아울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 5월 6일 명동대성당에서 우리 민족과 한국교회를 마리아께 봉헌했다. 한국 천주교회는 또 대구 성모당, 청주교구 감곡성당, 수원교구 남양 성모성지 등 성모 순례지를 지정, 신자들의 건전한 성모신심을 함양시키고 있다. 한국교회는 이처럼 성모 마리아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오늘날 활발한 마리아 신심운동은 바로 이같은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평화신문, 2012년 8월 12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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