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와 일상의 거룩한 표징] 거룩한 표징 : 숫자 하느님께 이스라엘의 한 의로운 이가 성경의 지혜서를 통해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재고 헤아리고 달아서 처리하셨습니다. … 온 세상도 당신 앞에서는 천칭의 조그마한 추 같고 이른 아침 땅에 떨어지는 이슬방울 같습니다.”(지혜 11,20.22) 하고 말씀드립니다. 이 구절은 피조물을 통해 드러나는 수학에 대한 놀랄만한 경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숫자는 대부분 시간과 공간을 계산하는 데 기준이 되는 가치와 관련해서만 이해됩니다. 그러나 고대의 문화에서 숫자는 그러한 차원을 넘어 비밀을 암시하는 종교적 의미까지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특히 바빌로니아 문화권에서 잘 나타납니다. 바빌로니아 문화는 이러한 관점에서 아시아, 고대 그리스, 고대 이스라엘의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와 그 제자들은 숫자를 사물의 원리로 파악하였습니다. 여러 종교와 문화의 경우 하나부터 천까지 늘어선 숫자 가운데 일부 숫자들에는 각별한 의미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모든 대립과 모순을 감추고 파기하는 숫자인 하나는 ‘산출하는 일자(一者)’, 곧 신적인 것을 상징하는 숫자로 여겨집니다. 둘은 대립과 모순의 상징으로 이해됩니다. 셋과 일곱은 완전을 의미하는 숫자입니다. 열둘은 중국, 바빌로니아, 이집트에서 대우주를 상징하는 숫자로 이해됩니다. 또한 열둘은 이스라엘의 지파를 비롯해서 예수님의 제자 그리고 천상 예루살렘 성문의 숫자를 의미합니다. 천은 다시 완전수(完全數)로 파악됩니다. 주요한 신비주의, 예를 들어 유대교의 카발라뿐 아니라, 주술과 난해한 미신들도 숫자의 매력에 빠져들었습니다. 학문적 연구를 통하여 또는 스스로를 명시적으로 신비롭게 드러내는 수학은 미시세계와 거시세계의 토대를 이루는 것으로 경탄과 의문을 자아냅니다. 아울러 신비로운 수학에서처럼 중세의 대성당,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수난곡 그리고 인간의 다양하고 위대한 작품들에서 아름다움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통하여 인간은 자신의 육체와 영혼의 실존 안에서도 이러한 질서를 발견합니다. 성경 시편 139장 익명의 저자는 모든 숫자와 계산을 넘어서서 작용하는 것에 관하여 경탄과 감사에 휩싸입니다. “제가 오묘하게 지어졌으니 당신을 찬송합니다. … 하느님, 당신의 생각들이 제게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것들을 다 합치면 얼마나 웅장합니까? 세어 보자니 모래보다 많고 끝까지 닿았다 해도 저는 여전히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시편 139,14.17 이하) [2012년 2월 5일 연중 제5주일 가톨릭마산 15면, 에콘 카펠라리 주교 저, 안명옥 주교 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