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와 일상의 거룩한 표징] 거룩한 표징 : 문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이는 그리스도께서 라오디케이아의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하신 말씀으로 요한묵시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늘 벽이나, 동굴, 또는 천막을 이용하여 보호받으려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 제한된 공간 안에서 자력으로만 살 수 없기에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사람을 만나고 물건을 얻기 위하여 자유롭게 출입을 할 수 있는 문을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문 뒤쪽에 있는 공간 안에 홀로 머물거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머무르기 위해서 문을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합니다. 돌쩌귀에 달려 있는 문을 여닫음으로써 연결과 분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새로운 삶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문을 여는 것이나 위험의 원천을 차단하기 위해 문을 닫는 것은 상황에 따라 실존을 결정하는 과정에 속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세상의 빛과 진리와 생명이실 뿐 아니라 또한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을 통해 당신을 착한 목자로 소개하시면서 “나는 양들의 문이다.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7-10)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언자 에제키엘은 환시를 통하여 재건축된 예루살렘 성전을 보았습니다. 아울러 이 성전의 동쪽 문 위에서 “이 문은 잠가 둔 채, 열어서는 안 된다. 아무도 이 문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이곳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겨 있어야 한다.”(에제 44,2)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고대 교회의 주석에 따르면 동쪽을 향해 닫혀있고 오로지 주님만을 위해서 열리는 이 문은 성모 마리아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닫혀 있는 문이십니다. 그 문은 오직 임금들 중의 임금이신 분만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동방 교회에서는 오늘날에도 제단의 공간으로부터 회중석을 분리하기 위해 세워진 성화상 벽에 걸려 있는 ‘임금님의 문’에 성모님의 수태고지 그림을 걸어 놓습니다. 서방 교회는 로레토 성모 찬가에서 성모님을 ‘천상의 문’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교는 성전 봉헌 예식을 거행하기 전에 하느님 집의 문을 주교 지팡이로 두드리며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문이다. 내게 들어오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그러고 나서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임금님께서 들어가신다.”(시편 24,9)하고 시편 24장을 노래합니다. 문은 생명의 길을 열어주지만 죽음의 길도 열어줍니다. 미국 극작가 손튼 와일더(Thornton Wilder)의 작품 『긴 성탄 만찬』에는 여러 세대가 함께 사는 한 가족이 두 개의 문 사이에 놓인 긴 식탁에서 성탄 식사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 쪽에 있는 생명의 문을 통하여 가끔 유모차가 들어옵니다. 때때로 한 남자나 여자가 식탁에서 일어나 혼자서 두 번째 문을 나갑니다. 이 문이 죽음의 문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그 문 뒤에 그리스도께서 서 계신다고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라오디케이아의 공동체에 당신 삶과 죽음을 내어 맡긴 사람은 당신과 함께 만찬을 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012년 3월 25일 사순 제5주일 가톨릭마산 15면, 에콘 카펠라리 주교 저, 안명옥 주교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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