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와 일상의 거룩한 표징] 거룩한 표징 : 성수 가톨릭 성당에는 출입문 가까운 곳에 성수대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성당 안에 들어서는 그리스도인은 일종의 ‘문지방 예절’(Schwellenritus)을 지키라는 권유를 받습니다. 그는 손가락 끝을 물에 담그고 나서 그 성수로 이마와 입술과 가슴에 성호를 긋거나 아니면 머리에서 가슴과 왼쪽 어깨로부터 오른쪽 어깨로 커다란 성호를 세 번 그어야 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정화 예식이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성당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문지방을 염두에 두고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상은 먼지가 낀 거울처럼 일상생활의 먼지로 늘 흐려져 있습니다. 자신에게 성호를 긋는 이러한 아름다운 관습은 우선 새롭게 되려는 갈망과 결합되어 있을 때 온전히 이해됩니다. 사람들은 가장 행복한 순간에 다시 태어난 것 같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소중한 시간들은 마치 삶의 양념과 같은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에게는 긴장 관계에 놓여 답답함을 느끼는 때가 더 많습니다. 영적으로 살아가는 가톨릭 신자들은 자주 교회에 가서 그들의 마음을 비추어주는 빛과 앞으로 나아갈 길을 위한 힘을 청합니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힘들고 무거운 것이 단지 슬프기만 한 것이 아니라, 죄의 결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합니다. 그래서 성당 입구에서 성수로 자신에게 성호를 그어 자신이 받은 세례를 기억에 떠올립니다. 세례받을 때에 세례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물 무덤’에 가라앉았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곳에서, 곧 죄에서 벗어나 새로운 실존 방식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그래서 세례대처럼 분수대가 성수대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례대와 성수대는 고해소와 마찬가지로 영적 쇄신의 근원으로 성당 문지방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습니다. 성수는 교회에서 여러 축복들과 더불어 사용됩니다. 사람과 물건에 성수를 뿌립니다. 이 성수를 축성할 때 구원 역사의 한 가지 또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기억에 떠오르게 됩니다. 그 사건들에서 물은 생명을 살리고 정화하는 피조물이라는 의미를 가졌었습니다. 홍해의 물을 예로 들어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 물을 건너서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약속된 땅으로 나아갔습니다(탈출 14,15-31 참조). 또 다른 예도 있습니다. 예언자 에제키엘은 환시를 통하여 예루살렘 성전에서 물이 솟아나와 결국 소금으로 짜게 변해버린 사해가 연수로 변하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에제 47,8 참조). 종종 성수에 소금을 섞기도 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명령을 따라 예언자 엘리사가 더러워진 물에 소금을 섞어 다시 깨끗하게 되살린 일을 떠올리게 합니다(2열왕 2,20 이하 참조). 또한 당신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에 비유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에서 떠올리게 합니다(요한 7,37 이하 참조). 주일 미사를 시작하면서 세례를 생각하며 성수를 축복하고 뿌리는 예식으로 공동 참회 예식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 이때 사제는 성수로 자신에게 성호를 그은 다음 미사에 참례한 회중에게 성수를 뿌려줍니다. 규모가 큰 성전이라면 사제는 그 안을 돌아다니며 성수를 뿌립니다. 이때에 성경 구절을 낭독하거나 노래 부릅니다. 오랜 전통에 따르면 주로 시편 51,9을 노래합니다. 라틴어로 이 구절은 “asperges me”로 시작되며, “우슬초로 제 죄를 없애 주소서. 제가 깨끗해지리이다. 저를 씻어 주소서. 눈보다 더 희어지리이다.”라는 내용입니다. [2012년 12월 16일 대림 제3주일(자선주일) 가톨릭마산 15면, 에콘 카펠라리 주교 저, 안명옥 주교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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