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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례] 하느님 백성의 모임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1-19 조회수3,061 추천수0

[전례를 살다] 하느님 백성의 모임

 

 

미사 전례에 대한 글을 연재하며

 

현대사회 안에 넓게 퍼져있는 초월의식의 실종은 신앙인에게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의 하나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가 생겨났다. 존중과 참여의 의미에서 보면 거룩한 미사의 “유통가치”는 광범위한 영역에서 추락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의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동시에 거기에서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전례헌장 10항)라고 설명하는 교회의 전례가 이로부터 엄습을 받았다. 특별히 성찬의 희생제사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요 정점”(교회헌장 11항)이라고 일컫는 성찬례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선(善)을 아는 사람은 그것도 한다.”는 희랍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말이 확실히 모든 사람에게 다 들어맞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지만 “진리의 고요한 힘”(R. 과르디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작용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참됨과 은혜로운 선물에 경탄하고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이 자신들에게 고마운 지표가 되는 사람들이 많다. 파묻힌 입구가 뚫리어 미사의 본질과 가치가 다시 잘 알려진다면 신앙의 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을 새롭게 자리매김할 수 있으리라 희망해본다. 요즘은 좋은 서적들이 많이 나와 신자들에게 도움을 주곤 하지만 역시 소수의 사람에게만 좋은 자료일 뿐이다. 이 글을 쓰는 사람은 필요한 자료, 좋은 자료 몇 권을 나름대로 정리하여 그 내용을 강론 형태로 꾸며 신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교를 박해할 당시 그리스도 신자들이 함께 모인다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112년 비트니아 지방(오늘날의 터키)의 총독 플리니우스(Jr.)가 황제 트라야누스 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체포된 그리스도인들이) 말하기를, 자신들의 죄는 정해진 날 동트기 전 마치 신에게 하듯 그리스도에게 찬송을 드리기 위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 것이라고 합니다.”

 

304년 북 아프리카 카르타고의 아눌리오 총독 앞에서 49명의 아비떼느 지역(오늘날 튀니지) 그리스도 신자들이 심문 받을 때 그들이 답변한 대답을 생각해 봅니다. 그 당시에 황제의 금령에도 불구하고 서로 모였던 이 그리스도 신자들은 “왜 서로 모였느냐?”는 재판관의 질문에 “그리스도 신자는 주님의 만찬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종교 자유 이후에도 변함없이 그리고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도 여전히 이러한 집회를 필요로 하며 또 “주일 미사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일이 되면 우리가 성당에 모여 오는 것처럼 사방에서 신자들이 자기들 성당에 모여 듭니다. 뉴욕, 파리, 도쿄, 나이로비 등 각지에서뿐 아니라 모스크바에서도 그렇습니다. 이는 마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이러한 단체를 함께 모으는 양, 모든 외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가 신비스럽게 함께 결속되어 있는 것같이 모입니다.

 

주일에 제단을 중심으로 모이는 우리는 실제로 내적으로 깊이 서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를 각자의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주님은 우리 세례일에 각자의 이마 위에 그분의 표지인 십자가를 표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당신 백성의 한 사람으로 받아주셨습니다.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그리스도 신자들의 결속은 외면적인 모든 차이들보다 더 중요합니다. 미사에 모이는 많은 사람들의 계층이 얼마나 다양합니까? 그들은 다양한 연령층과 생활 상태에서 모입니다. 그들은 각양각색의 사회계층과 직업군을 이루고 있습니다. 어린이, 젊은이, 성인들, 노인계층, 그리고 남자, 여자들, 정주민 가족들이 있는가 하면 타향, 타국에서 온 노동자들도 있습니다. 가난한 자나 부자로서 또는 기쁜 확신을 가진 사람으로거나 실망과 좌절, 고통에 짓눌린 사람으로서 옵니다. 삶의 벼랑에서 또는 아마도 죄에 짓눌린 상태에서도 모입니다. 그렇지만 전례의 참석자 모두는 다른 사람 안에서 형제자매를 보아야 하며 많은 사람들이 다른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곳에서도 그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통하여 한분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었고 우리가 같은 형제자매들이라는 엄연한 사실 앞에서는 사회적 위치나 신분과 언어의 차이란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날인 주일에 “당신을 기념하도록” 당신 백성을 함께 부르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모든 도시와 마을, 모든 지역에서 당신 자녀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분의 성경 말씀은 믿는 이들의 마음속으로 전달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사랑은 당신 백성들을 제단에 모읍니다. 이는 이미 사도들의 시대부터 그랬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초기 그리스도 신자들이 늘 “같은 장소에” 계속 모여서 형제적 일치 안에서 하느님 말씀을 듣고 그분이 베푸시는 만찬을 거행했다고 전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일 때,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매 주일 우리가 가지는 주일 집회에 있어서도 부활하신 분과의 이러한 만남이 이루어지며 주님의 현존이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임 가운데 들어오십니다. 주님은 성경이 봉독될 때 우리를 향해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성찬례의 제대 위에서 우리를 위한 생명의 빵이 되십니다. 전례는 늘 미사의 이러한 보이지 않는 중심 사상과 신비를 우리가 깨달을 수 있도록 표지를 통해서 제시해 줍니다. 그래서 사제가 미사 시작에 제의실에서 나와 직접 공동체에게 인사말을 하기 위하여 마이크 앞에 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첫 발걸음은 제대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는 제대 앞에 이르러 깊은 절을 하고 제대에 존경을 표시합니다. 어느 날에는 향을 피워 들고 제대 주위를 분향합니다. 제대는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가 실제로 이루어지고 믿는 이들을 한데 모으는 경외스러운 장소입니다. 여기서 소위 골고타의 구원적 십자가가 다시 세워지며, 또 여기서 높이 달린 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생명과 축복의 샘물이 흘러나옵니다. 여기서 주님은 지금도 인류를 사랑하며 도움과 구원을 소망하는 인간을 위하여 현존하십니다. 복음이 전하는 병든 부인이 신뢰를 갖고 그의 옷자락을 만진 것과 같이 여기서 우리도 그분의 옷자락을 지금도 만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신자에게 제대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감명 깊은 예를 나지안즈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390년경)의 한 서한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 “그녀는 병중에도 매일 밤 일어나서 살금살금 기어서 성당에 갔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제단에 기대고 기도하였습니다.” 성인은 자기 어머니도 임종 시에는 제대상을 꽉 붙잡게 해 달라는 소망을 지녔었다고 전합니다. “주님의 만찬 없이는 그리스도인은 살 수 없다.”고 카르타고의 그리스도 신자들은 외교인인 재판장에게 대답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주일날 주님의 제단 주위로 모여 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주님의 식탁”이요 우리는 이곳에 모여 있는 주님 백성의 집회 안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두고 우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월간빛, 2013년 1월호, 최창덕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평신도신학교육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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