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와 일상의 거룩한 표징] 거룩한 표징 : 분향 (1) “저의 기도 당신 면전의 분향으로 여기시고”(시편 141,2)라며 시편 저자는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이로써 분향은 그리스도교는 물론 유대교에서 무엇보다도 기도를 표현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원래 송진을 태우면 분향이 생겨납니다. 이 송진은 보스웰리아(Boswellia) 나무껍질에 맺힌 노란색 덩어리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고대에서는 이러한 송진과 다른 분향 재료들을 신에게 바치는 제사에만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송진을 태워 신전과 집을 연기로 채웠습니다. 이렇게 분향을 하면 신선한 향기가 났습니다. 사람들은 이 향기를 즐기고, 분향을 위생적인 목적과도 연관시켰습니다. 분향은 또한 지배자와 신들을 경배하는 표시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경우 성전 예배 중에 드리는 분향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대사제는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의 날을 맞이하여 성전의 가장 깊은 곳인 지성소에 들어가 다른 분향 재료와 함께 분향을 태웠습니다. 제대 위의 머물러 있는 향 연기는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를 상징합니다. 지성소의 언약궤 위에 머물러 있는 향 연기는 하느님과 이루는 화해와 대사제를 위한 보호를 의미합니다. 대사제는 하느님 영광의 어좌를 눈으로 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예배 때 분향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자신들을 가능한 한 이교도들로부터 구별하려는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교도가 사라지자 유대교 전례를 본뜬 분향 예식이 곧바로 그리스도교 예배에 도입되었습니다. 순례자 에테리아(Aetheria)는 390년경 예루살렘에서 거행되었던 주일 미사 때 향로를 성당 안에 들고 가서 부활 대성당 안 전체가 향 연기로 가득 찼었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교황께서 미사를 거행하러 입당할 때 초복사 일곱 명과 향을 든 차부제 한 명이 교황 앞쪽에 미리 자리를 잡고 행렬을 시작하였습니다. [2013년 1월 20일 연중 제2주일 가톨릭마산 15면, 에콘 카펠라리 주교 저, 안명옥 주교 역] [전례와 일상의 거룩한 표징] 거룩한 표징 : 분향 (2) 9세기 이후 미사 시작 때 향로를 들고 들어가는 관습이 정착되었고, 11세기부터는 제대 쪽으로 분향을 했습니다. 11세기 이후 희생제물인 빵과 포도주에도 십자성호를 세 번 긋고 그리고 원을 세 번 그리면서 분향을 했습니다. 아울러 제대뿐 아니라 전례에 참석한 모든 회중에게도 분향을 했습니다. 분향은 마치 하느님께 올라가는 연기구름처럼 기도의 거룩한 분위기 안으로 침잠하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 전례는 신약의 마지막 책인 요한묵시록을 기록한 선지자 요한이 본 천상 전례의 요소를 받아들였습니다. 요한은 천상 전례 중에 천사가 금향로를 들고 제대 쪽으로 다가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른 천사 하나가 금향로를 들고 나와 제단 앞에 서자, 많은 향이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함께 어좌 앞 금 제단에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천사의 손에서 향 연기가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하느님 앞으로 올라갔습니다.”(묵시 8,3 이하) 제대 봉헌식 때 제대에 도유한 다음 제대의 다섯 곳에 분향합니다. 이때 주교는 “하느님, 저희의 기도가 분향과도 같이 당신께로 올라가게 하소서. 그리고 향기로 가득 찬 이 집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영께서 당신 교회를 가득 채우게 하소서.” 하고 기도드립니다. 장례 미사 때도 분향합니다. 망자는 죽음을 맞이하지만, 여전히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지체로 남습니다. 이 지체는 살아 있을 때 받았던 성사들을 통해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신에도 분향하여 존경을 나타냅니다. 이는 마치 부활절 아침에 여인들이 존경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시체를 비싼 향유로 도유하려 했던 것과 같습니다. 공의회 이후 진행된 전례 개혁시기에 여러 지역에서 분향이 함축하고 있는 전통적 표징을 포기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성급하게도 분향의 포기가 마치 이교도들에게서 받아들인 표징을 버리고, 유대교의 예배 관습을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그 결과 교회에서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분향 관습을 포기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분향의 포기가 비록 선의에서 출발했다 할지라도, 이러한 포기는 결국 전례의 의미를 메마르고 척박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오로지 이성과 말씀으로만 아니라 이성과 말씀을 보완하는 표징으로도 찬미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합니다. 전례는 신앙에 기반하는 상상력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총제적인 작품이 되어야 합니다. 분향 역시 이 작품 안에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2013년 1월 27일 연중 제3주일(해외 원조 주일) 가톨릭마산 15면, 에콘 카펠라리 주교 저, 안명옥 주교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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