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를 살다] 미사의 시작 예식 (2) 십자성호 사제는 제단 앞에서 공경의 예인 깊은 절을 하고 대축일이나 주일에는 제대에 향을 피웁니다. 이어 ‘주례자석’으로 갑니다. 이 주례 사제석에서 주도자는 시작예식을 계속하고 말씀의 전례와 마감예식을 이끕니다. 사제석의 장소와 형태는 전례의 인도자 역할을 분명히 드러내 주어야 합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왕좌의 형태를 띠어서는 안 됩니다.(총지침 271항) 왜냐하면 교회의 교역자는 통치자가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봉사자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사제는 십자성호를 크게 그으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라고 말합니다. 이 말 안에는 이중의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만이 우리의 구원이 자리한다는 점입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들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은 성찬례 안에서 그 성사적 양식으로 재현됩니다. 십자성호를 그으면서 우리는 구원의 원천이자 목적이신 삼위일체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아울러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을 말하며 긋는 십자성호는 우리가 받은 세례를 상기시켜줍니다. 우리는 그분의 이름으로 세례의 물로 새로 태어났고 하느님 백성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 3-5) 이러한 의미로 신자들도 미사 시작 십자성호를 그으며 큰 소리로 ‘아멘.’이라는 응답으로 사제의 말을 뒷받침합니다. 십자성호는 가장 쉽게, 그리고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는 가톨릭신앙의 표지입니다. 우리나라 운동선수가 올림픽과 같은 국제시합에서 우승한 후 십자성호를 긋는 장면을 보게 되면 우리뿐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조차도 그 선수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립니다. 그럴 때면 우리 또한 덩달아 뿌듯하고 자랑스러워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하지 못합니까? 공공장소인 식당 또는 여러 형태의 공적, 사적모임에서 식사 전 십자성호를 긋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듭니까? 비록 습관적으로 십자성호를 긋는 분이라도 만나면 반갑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식사 전에 자연스럽게 십자성호를 긋지 못합니다. 어색하고 부담이 되는지요? 이마로 올라가는 오른 손의 무게가 천근은 더 되나봅니다. 아예 포기하거나 아니면 하더라도 옆에 있는 사람의 눈치를 봅니다. 신앙인을 드러내는 표시를 하는 것이 그리 짐이 됩니까? 어느 시대, 어느 민족에게서나 박해시대에 신앙인을 구별하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십자가를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나무로 십자가를 만들어놓고 그 위를 걸어가게 했다고 합니다. 신앙을 지키려는 사람은 차마 십자가를 밟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마태오복음 25장의 최후의 심판 장면에서 왼쪽과 오른쪽을 갈라놓듯이, 신앙을 고백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와의 구별을 십자가로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십자성호는 우리 신앙의 고백이자 증거입니다. 오늘날 박해시대에 목숨 바쳐 주님을 증거하였던 순교자가 될 만큼 굳건한 신앙을 요구하는 시대가 아닌데도 십자성호 긋는 것을 힘들어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시대에도 흔히 말하는 구교 신자들 가운데 많은 분들은 냉수 한 그릇 마시기 전에도 경건하게 십자성호를 긋습니다. 습관적으로 한다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평할지 모르겠지만 그 습관은 분명코 좋은 습관입니다. 여기에 외적으로는 형태의 아름다움을, 내적으로는 힘과 깊이를 새긴다면 금상첨화겠지요. 독일의 저명한 신학자 로마노 과르디니는 우리에게 십자성호에 대해 곱씹어 볼만한 말, 아름다움 말을 남겨 주었습니다. “십자가의 표시인 성호를 그을 바에야 제대로 옳게 긋자. 그저 아무렇게나 서둘러 남이 보아도 무언지 알아볼 수조차 없이 해서야 쓰겠는가. 아니다. 올바른 십자성호를 긋도록 하자. 천천히, 크게, 이마에서 가슴으로, 이 어깨에서 저 어깨로 이렇게 하다 보면 온 몸이 십자가의 표시와 하나가 됨을 느끼게 된다. 이마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다시 어깨에서 어깨로 그어나가는 성호에 모든 생각과 정성을 쏟으면 십자성호가 몸과 마음을 감싸주면서 나를 거두고 축복하고 거룩하게 함을 절로 느끼게 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십자가의 표시가 우주의 표시이고 구원의 표시인 까닭이다. 우리 주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모든 사람을 구원하셨다. 사람을 그 골수에 이르기까지 성화하시는 일 또한 이 십자가를 통해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를 올리기에 앞서 십자성호부터 긋는 것이다. 그것은 성호가 우리를 다스려 마음과 뜻을 하느님께로 돌려주기 때문이다. 기도를 드리고 나서 성호를 긋는 것은 하느님이 베푸신 바가 우리 안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이다. 유혹을 당할 때면 우리를 굳세게 해주도록, 위기에 처할 때면 우리를 감싸주도록, 축문(기도문)을 외울 때면 하느님 생명의 풍만함이 우리 영혼도 온갖 결실과 강복으로 채워주시도록 성호를 긋는 것이다.”(로마노 과르디니, 장익 옮김, 거룩한 표징, 분도출판사, 1976. 13쪽) [월간빛, 2013년 3월호, 최창덕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부설 평신도신학교육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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