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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림성탄] 전례주년에 따른 여정: 대림절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12-03 조회수4,025 추천수0

[하느님의 시간 속에 인간의 시간] 전례주년에 따른 여정 - 대림절 1

 

 

“교회는 수백 년을 지내오면서 신앙의 작품인 전례주년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전례주년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후 거쳐 온 2000년의 간격을 뛰어넘어 그리스도인들을 초대할 뿐 아니라, 그 당시 일어났던 일과 ‘동시’가 되게 하는 초대입니다. 이 책은 인간의 시간과 하느님의 시간을 이어주는 전례주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은 책입니다.”(책 서문에서) 

 

머리말 

 

라틴말에서 유래하는 대림절(Advent)은 도래를 의미하며, 아울러 도래에 대한 기다림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늘날 대림절은 거의 성탄절과 관련해서 언급되지만, 대림절은 현재로부터 가장 먼 미래에까지, 시간의 끝자락에까지 이어지는 다리를 놓아준다. 

 

의식 있는 그리스도인은 대림절의 사람이며, 교회는 대림절의 공동체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인류의 한가운데에서 그리스도를 향한 여정에 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길의 끝에서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림절은 성탄절을 앞둔 시기만이 아니라, 교회가 순례의 여정에 있는 한 항상 대림절이다. 다음의 텍스트들은 대림절 주제와 관련한 다양한 글들이다. 

 

예언자들 - 성루 위의 파수꾼들 

 

그리스도 탄생 이전 긴 대림 시기 동안 가장 두드러진 인물 중에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말로써 “일상의 영역을 찢고 깊은 상처를 내어” 거룩한 것을 말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하느님의 권능을 받은 예언자의 말이 마치 구름을 뚫고 번쩍이는 번개처럼 내리치며, 또한 이 말은 때가 되었을 때 하느님에 의해 실현될 위대한 약속들을 끊임없이 거듭 되풀이한다. 파수꾼이 성벽의 높은 망루에서 동이 터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며 바라보듯이, 이스라엘의 예언자들도 메시아가 도래할 마지막 때를 고대하였다. 

 

희망의 어머니들 - 마리아와 엘리사벳 

 

루카복음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마리아에게 전해진 예수님의 탄생 예고”(루카 1,26-38) 라는 신비에 이어, “마리아의 방문”(루카 1, 39-56)이라는 신비에 대해 말해 준다. 두 여인이 만날 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 요한이 자기 어머니 엘리사벳의 태중에서 기쁨으로 뛰노는 일이 일어났다. 천사의 인사말(루카 1,28)과 엘리사벳의 인사말(루카 1,42)이 합쳐져서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날마다 바치는 기도인 “성모송”의 첫 부분을 이루었다. 엘리사벳의 인사말에 마리아는 마니피캇(Magnificat; 루카 1,46-55)을 노래했다. 이 노래는 대림절의 노래이며, 약속의 노래이다. 그 속에는 이미 이루어진다는 확신이 공언되고 있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 - 대림절에 외치는 이 

 

요한은 메시아의 도래 이전, 예수님의 탄생 이전 긴 대림절의 끝자락에 등장하는 구약 시대의 마지막 예언자이다. 그는 예언자 이사야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마태 3,3; 이사 40,3)하고 일찍이 말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세례자의 투옥과 순교로 비로소 그리스도 이전의 대림절은 끝이 난다. 마지막 때가 세상의 시간 속으로 뚫고 들어오고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신다. 그리고 우리는 역사의 대림절 동안 그분께서 두 번째 오실 때까지 다른 그 누구도 기다릴 필요가 없다. 

 

* 위의 내용은 ‘하느님의 시간 속에 인간의 시간’을 요약 발췌한 것입니다. [2013년 12월 1일 대림 제1주일 가톨릭마산 제6면; 에곤 카펠라리 저, 안명옥 주교 · 홍성군 역]

 

 

[하느님의 시간 속에 인간의 시간] 전례주년에 따른 여정 - 대림절 2

 

 

슬기로운 처녀들 

 

마태오복음에 나오는 열 처녀는 그리스도와 마지막 때의 만남이 약속되어 있는 교회를 대변한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시간은 교회사의 흐름에서 언제나 지루한 “긴 시간”으로 느껴진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향해 깨어 있어야 할 긴장이 영적인 해이로 점차 사라지고 있다. 교회의 전례주년이 끝나기 직전에 열 처녀의 비유를 봉독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 교회에 영적인 피로와 체념을 훈계하기 위해 세상의 마지막에 대해 비유를 들어 말씀해 주신 것이다. 수십 년 전 죠르쥬 베르나노스(1888~1948 프랑스 가톨릭 쇄신운동의 주창자)는 신앙에 피로해진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은 젊습니다. 다만 당신들이 늙었을 뿐입니다.”라는 예언자적 분노의 외침으로 이 에너지의 원천을 기억하도록 촉구하였다. 

 

늘 대림절이다 

 

많은 사람을 특별히 감동시키는 전례주년 중의 한 시기는 대림절, 곧 성탄절을 준비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의 전례는 구세주의 탄생에 대한 이스라엘의 긴 기다림을 말해 주고 있지만은 않다. 전례문들은 세상 시간의 마지막에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에 대해, 재림(Paruise)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따라서 대림절은 매년 성탄 대축일 전 네 주간의 시기에만 한정되지 않고, “주님께서 언젠가 다시 오실 때까지” 늘 대림절이다. 

 

깨어 있는 종들 

 

루카 12장 35~40절에 나오는 깨어 있는 종들은 교회 전체를 반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교회의 역사에서 어느 시대에나 영적으로 지쳐서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을 잃어버린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에서 말씀하시는 깨어 있는 종들은 오히려 교회에 대해 그들에게 뒤지지 말라는 훈계이자 초대이다. 띠를 매고 종들에게 시중드는 ‘주인’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며, 그분께서는 교회가 맞이할 마지막 때를 위해 약속하신 바를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봉사를 통해 앞서 보여주셨다. 

 

흔적들 

 

찾는 것과 발견하는 것은 종교적 삶에도 중요하다. 믿는 사람은 평생 동안 계속해서 일상에 스며들어 있는 하느님의 흔적을 찾게 된다. 하느님은 당신을 감추시기도 하지만, 구름에 가려도 해는 늘 있듯이 그분께서는 언제나 현존하신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느님을 자유와 사랑으로 찾아 나서야 한다. 사람은 삶의 깊이와 높이를 알면 알수록 더욱더 주의 깊게 이 세상을 비추는 하느님의 빛의 흔적들을 주목하게 된다. 그 흔적들이 없는 모든 날은 사람에게 있어서 잃어버린 시간과 다름없다. 대림절은 이 하느님의 흔적들을 깨어 있는 감각으로 유의하도록 계속해서 초대한다.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하느님 나라는 신약성경의 공관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중요한 주제에 속한다. 주님은 많은 비유에서 하느님 나라에 대해 이야기하시고, 한편으로 이 나라가 이미 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직 오고 있는 중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청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되는 그러한 인간 세계의 상태를 갈망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미래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교회는 자신의 중심에 있는 하느님 나라의 흔적들을 끈기 있게 가리키고 있다. [2013년 12월 8일 대림 제2주일(인권주일) 가톨릭마산 제6면; 에곤 카펠라리 저, 안명옥 주교 · 홍성군 역]

 

 

[하느님의 시간 속에 인간의 시간] 전례주년에 따른 여정 - 대림절 3

 

 

대림절의 인내 

 

신약성경의 야고보 서간은 성숙한 인내에 대한 소중하고 값진 말씀을 전해준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주님의 재림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를 보십시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야고 5,7-11) 이러한 인내하는 힘은 교회와 그리스도인 각자에게서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그리고 이미 시작된 우리의 미래이신 그분을 내다봄으로써 자라난다. 인내는 긴 여정의 한 부분으로 작은 발걸음을 늘 다시 내딛도록 가르친다. 

 

익어감의 때 

 

복음서들에서 하늘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모든 비유 말씀은 대림절의 특색을 담고 있는 내용들이다. 비유들 중의 하나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마치 씨앗이 자라는 것과 같다고 말씀해 주신다(마르 4,26-29). 말하자면 씨앗은 하느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신 리듬에 따라, 원하시는 때에 다가온다. 그렇다고 이 비유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마주해서 가만있으라는 요구는 아니다. 성경의 비유에 등장하는 씨 뿌리는 사람처럼 인간은 “하느님의 협력자”(1코린 3,9)가 되고, 하느님의 나라가 자라는 데 이바지하도록, 전적으로 부름을 받고 있다. 동시에 그는 그에게 대부분 감추어져 있는 하느님의 계획에 순응해야 한다. 

 

어디를 향해 가는 길인가? 

 

성경에서 제시하는 믿음의 시각에서 볼 때 사람의 인생행로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성경의 지평에서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이 길의 기원이자 동시에 목표이다. 모든 사람은 그 존재 자체로 하느님을 향한 방랑자이거나 순례자이다. 구약성경의 신앙 선조들은 약속된 땅에 하느님께서 계시는 본향을 자신들이 가야 할 목적지로 보았다.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과의 영원하고 기쁨이 넘치는 삶을 자신들의 인생행로의 목적지로 본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께서는 길이자 길 위의 양식(영성체)이요 순례의 목적지이다. 

 

길을 가기 위한 양식 

 

엘리야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대림절의 길에서 힘을 북돋아 주었던 빵(1열왕 19,1-13 참조)과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된 고향으로 가는 길에서 먹고 살았던 만나(탈출 16,13 이하 참조)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제정하여 길을 가는 교회에 주어 보낸 성체성사의 빵을 가리키는 표지들이다. 순례길을 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빵의 형상으로 건네지는 양식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다. 

 

얼마 남지 않은 때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하고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서 쓰고 있다.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곧 다시 오시기를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러한 미래를 바로 눈앞에 둔 그리스도인에게 겉으로 보기에 가장 중요한 것도 별거 아닌 것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교회는 2천 년 역사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그럼에도 사도의 말씀은 그 타당성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매 순간 세상 안에서의 한 순례자이고, 그래서 언제나 얻은 것을 모두 다시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은 신앙의 눈으로 볼 때에 이 세상 것을 바라보며 절망하거나 냉담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사라지는 모든 것은 하느님께로 가서, 그분에 의해 정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2013년 12월 15일 대림 제3주일(자선주일) 가톨릭마산 제6면; 에곤 카펠라리 저, 안명옥 주교 · 홍성군 역]

 

 

[하느님의 시간 속에 인간의 시간] 전례주년에 따른 여정 - 대림절 4

 

 

항상 기뻐하시오 

 

그리스도인들은 본시 웃을 이유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오시고, 당신 아드님 안에서 항상 그들 가까이 머물러 계시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기쁨은 언제나 지금 체험하고 있는 모든 것보다도 더 큰 어떤 것을 이 세상에서 미리 맛보는 기쁨에 지나지 않는다. 요한복음의 고별사에서 예수님께서는 역사의 긴 대림절 끝에 맛보게 될 기쁨에 대해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하고 말씀하신다. 

 

하늘은 이슬을 내려라 

 

예언자 이사야의 책에 영적 이슬을 약속하시고 교회의 전례에 받아들여진 하느님의 말씀이 있다.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름이 피어나게, 의로움도 함께 싹트게 하여라. 나 주님이 이것을 창조하였다.”(이사 45,8)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을 청하는 것은 일종의 대림절 기도이다. 새로운 변화를 갈구하는 시대마다 믿는 이들은 그 변화를 위해 기도한다. 교회는 전례주년의 대림절에 지난날의 이 호소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그 호소는 그것을 넘어 시대에 맞게 지속된다. 교회의 모든 시간이 대림절의 시간이며,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샛별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세상의 빛”(요한 8,12)이라 하신다. 그래서 고대 교회는 태양을 그리스도를 위한 상징으로 보았다. 또 다른 하나의 별이 그리스도를 위한 상징으로 통용되는데, 바로 샛별이다. 요한 묵시록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일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에게 “나는 또 그에게 샛별을 주겠다.”(묵시 2,28) 하고 약속하신다. 그 말씀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다스림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묵시록의 끝 부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샛별에 비교하신다. “나는 다윗의 뿌리이며 그의 자손이고 빛나는 샛별이다.”(묵시 22,16) 그리스도의 대림절 속에 산다는 것은 영원한 날이 밝아오기 시작할 때, 그분께서 샛별로 떠오를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광야에 꽃이 피리라 

 

뜨겁게 타오르는 땅, 바싹 마른 땅. 광야에 대한 이 묘사는 이사야 예언서에 나온다(이사 35,7). 광야 지대는 종종 사람들이 생동감 넘치는 자연과 일상의 분주함 한가운데에서도 빠질 수 있는 영적 광야에 비견된다. 그것은 고독, 질병, 허무, 사랑받지 못함의 “광야”이다. 도움을 주는 이가 없는 사람, 그 사람은 실제로 광야에 있는 셈이다. 예언자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으로 메시아 시대에 광야가 정원으로 꾸준히 변해 나갈 것이라고 약속한다(이사 35,1-10). 이 예언은 인류에게 자기 역사의 긴 대림절 속에서 가야할 길을 비추어 주는 하나의 빛이다. 

 

아무 것도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성경은 마치 화산이 분출하는 것처럼 영혼의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많은 물음들을 전해주고 있다. 요한복음은 돌아가시기 전날 저녁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고별사에서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요한 16,16-23)라고 전해준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그분과의 최종적인 만남을 기다리는 시간은 중요한 물음의 시간이기도 하다. 대림절의 기다림에서 “조금 있으면” 동안에는 묻게 된다. 세상 안에 그리고 삶 속에 많은 것들이 수수께끼 같고, 고통스럽도록 모호하기 때문이다. 저녁이 없는 영원의 빛 속에서는 물을 필요가 없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2013년 12월 22일 대림 제4주일 · 12월 15일 예수 성탄 대축일 가톨릭마산 제6면; 에곤 카펠라리 저, 안명옥 주교 · 홍성군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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