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를 살다] 영성체 예식 축성(祝聖)하고 봉헌한 음식인 거룩한 주님의 몸을 받아먹는 식사를 영성체라 합니다. 미사가 잔치라는 성격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부분입니다. 잔치의 특성은 함께 먹고 마시는 데서 느끼는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자신의 몸을 우리의 음식으로 내놓으신 그리스도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 가장 강렬하게 드러나는 곳도 바로 영성체를 통해서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현재 우리가 받아먹는 성체를 가지고서는 도대체 식사 잔치의 성격도, 그리스도의 사랑도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입에 넣으면 금방 녹아버리는 무슨 종잇조각 같은 작은 제병 모양은 도통 빵이란 생각이 들지 않기도 합니다. 50년도 넘은 옛날, 첫 영성체 준비 교리를 배울 때 수녀님에게서 들은 말씀이 지금도 머리에 맴돕니다. “예수님의 몸을 씹어 먹으면 예수님이 피를 흘리시니까 씹지 말고 삼켜야 한다.” 불행히도 지금도 그렇게 알고 계시는 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식탁에서 부모님이 어린 아이들이나 자녀들에게 음식을 건네주실 때 “꼭꼭 씹어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럼 성체는 음식이 아닌가요? 사제가 영하는 큰 제병의 성체는 씹어 드시는데 작은 성체는 삼켜야 하는지요? 경직된 교리가 실천적인 면에서 구체화되는 잘못된 전형입니다. 일선 사목자들은 씹을 수 있을 정도로 크고 두꺼운 제병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그것도 본당 예산 문제와 연결되는지? 무엇보다도 주님의 몸이 음식이라는 생각이 들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최후의 만찬은 파스카 식사의 양식을 따른 식사였습니다. 영성체 안에서 성찬례 거행과 실제적인 성찬례 참여가 완성됩니다. 영성체는 잔치 전체의 본질적 부분이자, 두 번째 정점이며 원래의 목표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몸과 피를 건네주시면서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와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미사는 그 기원과 내용이나 형식으로 보아 성대하고 거룩한 식사 예식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체와 성혈로 변하는 “변화 신심” 또는 경배 신심에만 머물러 있고 그로써 만족하기를 원한다면 그는 성찬례를 거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찬례의 목적과 의미는 주님의 몸을 받아 먹음으로써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고 또한 같은 빵을 나누어 먹는 그리스도인들 간에 이루는 일치에 있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6-17 참조) 이 예식의 라틴어 명칭(‘꼬무니오, communio’)은 원래 ‘상호 염려’, ‘공동 소유’, ‘함께 나눔’ 등을 뜻했습니다.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함께 나누거나 함께 참여함을 뜻했습니다. 후에 이 단어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 56)는 성경 말씀에 따라 거룩한 잔치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이루는 일치와 친교로써 그 의미를 가졌습니다. 예식에 관해서는 초세기까지만 해도 별도의 영성체 예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4세기 이후부터, 정확히는 313년 콘스탄틴 대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종식령으로 인하여 신자 수가 늘어나면서 합당하게 영성체 준비를 하지 않거나 중죄를 짓고서도 함부로 성체를 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게다가 성체와 성혈은 예수님의 거룩한 몸과 피라는 사실이 강조되고 여기에다 부당한 영성체를 경고하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과 교부들의 가르침이 부각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올바른 마음가짐 없이 그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각 사람은 자신을 살피고 나서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셔야 합니다.”(1코린 11,27-28 참조)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합당하게 성체를 받아 모시기 위한 준비 예식이 하나 둘씩 도입되었습니다. 이제 자연히 주님을 합당하게 받아 모시려면 먼저 각자가 마음을 깨끗이 하고, 주님 및 형제들과 화해를 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하여 차츰 영성체 전후의 예식을 강화했습니다. 그 결과로 1년에 한 번에서 두 번까지 혹은 더 드물게 성체를 모시는데 만족함으로써 교회사 안에서 성찬례의 올바른 관점이 점점 멀어져갔습니다. 이러한 배경에 따라 형성된 현행 영성체 예식은 영성체를 합당하게 모시기 위한 준비 예식(주님의 기도), 본래의 영성체(동반 행렬, 영성체 노래), 그리고 받아 모신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감사 예식(영성체 후 기도)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영성체 예식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모시기 위해 올바른 준비를 하고 그에 맞갖은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데에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 (1) 우리는 흔히 주님의 기도 하면 으레 모든 사람들이 바칠 수 있는 기도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 역사를 보면 초대교회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그 때만 해도 주님의 기도는 교회의 가장 소중한 보배 중의 하나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는 교회의 정회원들, 곧 세례 받은 교인들에게만 유보되어 있었으며, 미신자들, 심지어는 예비 신자들에게조차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주님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를 바칠 수 있다는 것은 세례 교인의 특권이었습니다. 이에 주님의 기도는 또 다른 이름인 ‘신도들의 기도’라는 명칭도 가졌습니다. 그 시대 신자들이 얼마나 삼가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이 기도를 바쳤는가는 동서방을 막론하고 교회의 전례에서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주님의 기도 인도문만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동방 교회가 주님의 기도를 시작하기 직전에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는 인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여,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또한 분수에 넘치지 않게 하늘에 계신 하느님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삼가 아뢸 수 있게 하소서, 하늘에 계신 우리 우리 아버지….” 서방 교회인 로마 교회는 오늘날도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 전에 전통적인 인도문인 “하느님의 자녀 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 하고 주님의 기도를 바치게 인도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자리도 동서방 교회 공히 성찬 전례와 관련을 맺어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는데 합당한 준비의 기도로 바쳤음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옛 교회에서는 이처럼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늘 삼가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다듬곤 하였는데 오늘날 우리에게서 이러한 태도를 찾아보기 어려운 점은 유감스럽습니다. 이제라도 제대로, 그리고 마음을 모아 기도 중의 기도요,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유일한 기도인 주님의 기도를 정성껏 바칩시다. [월간빛, 2014년 7월호, 최창덕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부설 평신도신학교육원 원장)] [전례를 살다] 주님의 기도 (II) 이번 호에서는 주님의 기도 내용에 대해 주요한 주제 3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호칭 : 먼저 주님의 기도 첫 마디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호칭인데 신약성서학자 J. 예레미아스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직접 발설하신 첫 마디는 ‘아빠’ 라고 밝히며 이에 대한 성서적 근거와 의미를 알려주고 있습니다.(「주의 기도문」, 요아킴 예레미아스, 분도출판사, 1973, 33-39)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지만 예언자들의 시대에 와서는 그들의 설교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아마도 자식의 잘못에 대해 아버지는 용서와 자비로 답을 하듯이 이스라엘의 죄와 잘못에 대해서도 하느님은 언제나 용서와 자비로 품어 주셨음을 드러내기 위하여 예언서들은 아버지 표상을 즐겨 사용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 아람어 ‘아빠!(Abba!)’라는 호칭으로 아버지를 부르시고 기도를 시작하였던 것으로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예를 들면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기도를 알려주는 마르코 복음은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14,36) ‘아빠’라는 낱말은 어린아이가 젖을 뗄 무렵 아버지를 부를 때 쓰는 말로 아마도 전 세계 공통어일 것입니다. 이처럼 ‘아빠’라는 말은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 처음으로 쫑알대는 말마디입니다. 아이들은 음성 모음이 들어간 ‘엄마’라는 말보다 양성 모음으로 구성되어 있는 ‘아빠’라는 단어를 더 빨리, 쉽게 배운다고 합니다. 이 호칭이 주는 의미는 아마도 첫 아이를 낳고 기르다 어느 날 처음으로 아이로부터 들어본 아빠에게는 그 감동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 감동은 놀라움과 충격, 그리고 진한 감동으로 전해져 아버지로서의 부성을 심어 주어 자식을 위한 바침의 삶을 결심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줄 것입니다. 이 말이 주는 친밀감과 순박함, 그리고 그윽한 부자간의 결속감은 좀체 다른 단어로 대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성경에서 이런 낱말로 감히 하느님을 부르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제자들에게 가르치면서 하느님을 당신처럼 ‘아빠’라고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또한 하느님을 예수님처럼 신뢰를 가지고 친밀하게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로마 8,15 ; 갈라 4,6)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라는 말씀을 연관시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비슷한 예로 친구라는 단어를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5,15) 이는 가치의 전도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인 우리는 기도할 때 예수님을 친구라고 부르기를 어려워하고 꺼려합니다. 아마도 유교적인 사고방식에 젖어서 그런가봅니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의 사고에는 예수님을 친구라고 부르는 기도가 전혀 어색하지 않고 잘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네 어린이미사에서 아이들은 즐겨 ‘우리 친구 예수님’ 하고 부르며 기도합니다. 부르는 데도 어색함이 없으며 듣기에도 무척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편안한 느낌마저 줍니다. 성인들의 사고에서는 뭔가 거북하게 여겨지는데 아이들의 세계에서는 자연스러운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아이들이 어른보다는 단순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른들은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생각이 많습니다. 친구 사이가 순수하게 오래 지속되기 위해서는 생각이 많으면 안 됩니다. 자기를 생각하고 주위를 생각하고 형편을 생각하고 앞길을 생각하는 등 생각이 많으면 불가합니다. 단순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친구라고 부르려면 우리가 단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친구들입니다. 성령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또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하느님 아버지를 티 없이 맑고 순수한 마음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신뢰로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사 전례 안에서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 전 초대문이 요구하는 삼가고 두려워하는 마음은 우리 자신이 예수님이 가지신 아버지에 대한 친밀함과 순수한 믿음이 부족한 데서 오는 두려움이 아닐까합니다. 아울러 이 초대문은 아빠가 가지는 아이 같은 믿음으로 한없이 크시고 전능하신 하느님을 부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고 전적인 은혜이자 선물임을 깨닫게 합니다. 2. 간청 :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첫 번째 간청은 일용할 양식인 “빵을 청하는” 것입니다. 교부들은 이 청원을 처음부터 미사와 관련해서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매번 새롭게 생명의 빵을 우리에게 주시도록 청하는 것은 유익한 일입니다. 이 빵을 받아 모시는 것이 당연한 것인 양 아무 조심성도 없이 그렇게 받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는 음식을 먹을 때 우리 어린이들이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음식을 먹는 일이 없도록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어린이들은 우선 주십시오! 하고 “청원”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먹는 음식이 선물이라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에서 이미 잊어 버렸거나 혹은 잊어 버릴 위험이 있는 실천, 즉 식탁의 기도를 바치는 습관의 깊은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빵을 청하는 기도를 바침으로써 우리가 제단에서 성체를 모시기 전에 매번 주시기를 “청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성체는 하느님이 주시는 모든 선물 중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큰 선물입니다. 참으로 이 선물을 그리스도인답게 받고자 하는 사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매번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하고 간청해야 합니다. 영성체 전에 바치는 주님의 기도의 둘째 간청은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나아갈 만한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항상 시인해야 합니다. 죄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뿐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도 사해진다고 교회는 가르쳐 왔습니다. 옛 사람들은 주님의 기도에서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는 것을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여기서 주님의 식탁으로 나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마음을 깨끗이 합니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비록 우리가 목욕을 하고 몸을 깨끗이 하였다 하더라도 우리의 얼굴은 일상생활의 먼지를 늘 뒤집어쓰고 있기 때문에 얼굴을 씻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다. 우리는 성체를 모시기 전에 ‘깨끗한 얼굴’로 이 거룩한 식탁에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깨끗이 해야 한다.”는 말씀을 우리에게 남기셨습니다. 죄의 용서를 청하는 기도는 영성체 준비와 관련해서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용서는 우리가 절대 쉽게 할 수 있는 덕행이 아닙니다. 이 기도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용서를 주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주님의 명에 따라 복음의 정신으로 우리 이웃에게 실천하려고 결심합니다. 영성체는 개개인을 그리스도와 일치시킬 뿐 아니라 한 식탁에서 음식을 먹는 친구들도 서로 일치시킵니다. 영성체를 통하여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내가 깊이 일치할 뿐 아니라 나와 함께 하는 그 몸의 지체들과도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와도 원한을 품지 않고 한 식탁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또 형제와 같이 좋아 하겠다는 마음의 결의를 영성체 전에 고백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고 타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 전례에서는 전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서로 교환하던 평화의 인사를 주님의 기도와 영성체 사이에 행하게 하였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이 평화의 인사를 영성체 전에 행하도록 다시 규정하여 세계 어디서나 이 평화의 인사가 신자들의 큰 기쁨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입으로 말한 것을 행동으로 분명히 표시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하도록 적어도 노력은 해야 합니다. 3. 부속기도와 환호 : 교회는 초세기부터 주님의 기도 마지막 부분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또는 “악에서 구하소서.”를 확장한 별도의 기도문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악에서 구하소서.” 를 확장한 주님의 기도의 부가(첨가) 기도입니다. 사람은 영성체로 주님과 일치할지라도 다시금 악에 빠질 위험을 안고 삽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모든 악에서 보호하시고 구원의 평화를 누리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지상의 어디에선가 “우리 시대의 평화”는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개인과 교회 공동체를 혼란과 죄에서 보호해 주십사는 간청도 마찬가지로 절박합니다.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방향감각 상실과 이념의 혼란들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진리와 정의, 그리고 하느님과 그분의 계명을 왜곡시키고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부속기도의 이 청원들은 폭넓은 현실성을 가집니다. 이 청원들은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과 관계됩니다.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 이 찬사는 그리스도교의 “원(原) 기도”입니다. 이 찬사는 하느님 나라의 결정적 승리를 확신하는 원시 공동체의 확고한 신념을 표현하고 있으며 묵시록의 환시에 나오는 찬양 외침과 같습니다. 대영광송 안에서 그리스도께 드리는 마침 찬양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월간빛, 2014년 7월호, 최창덕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부설 평신도신학교육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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