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사순 제1주일 2011년 3월 1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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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점수 | 작성일2011-03-11 | 조회수482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사순 제1주일 2011년 3월 13일.
마태 4, 1-11, 창세 2, 7-9; 3, 1-7.
사순 시기 첫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기 전 40일 동안을 교회는 사순(四旬) 시기라 부르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특별히 기억합니다. 사순 시기는 교회가 로마제국으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은 4세기부터 시작된 관행입니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로 태초에 인간이 유혹에 빠졌다는 창세기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고, 마귀로부터 유혹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창세기와 복음서가 전하는 이 두 개의 이야기는 실제 일어난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 물론 아니고,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리기 위해 다채롭게 꾸며진 이야기들입니다.
창세기에 따르면, 하느님이 베푸신 인간의 생명이고 또한 세상입니다. 인류 역사 안에 불행이 있는 것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선(善)과 악(惡)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판단하고 행동하였기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창세기는 그 사실을 말하기 위해 인간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먹는 유혹에 빠졌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인간은 ‘먹음직하고 탐스럽고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아서 먹었습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자기를 중심으로 판단하고, 무엇이라도 자기에게 이로울 것 같으면, 해버리는 비극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 모든 것을 그에게 허용하셨지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과 악의 기준을 자기 안에 두고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실제로 자기를 중심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였고, 그 결과 그들은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았다고 창세기는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를 기준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여 행동하면서, 하느님과 동료 인간 앞에 부끄러운 존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유혹받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유혹하는 자가 예수님에게 권하는 것은 ‘탐스럽고 자기를 영리하게 해 주는’ 길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돌을 빵으로 바꾸는 기적을 행하여 모든 사람이 자기를 따르게 하라는 유혹입니다. 먹고 사는 데에 큰 도움을 주는 길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서 그들로부터 환영받는 인물이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유혹을 거절하십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지, 먹고 사는 데에 도움이 되자고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두 번째의 유혹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쇼를 하라는 말입니다. 예나 오늘이나 신앙인들이 쉽게 받는 유혹입니다. 기적이 일어났다고 소문을 내면, 사람들은 많이 몰려옵니다. 가톨릭교회 안에도 교회 밖에도 그런 현상들은 있습니다. 사람의 능력을 넘어서는 기적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기적을 해 보라는 유혹도 거절하십니다.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신명 6, 16)는 구약성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거절하십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이 우리의 생활공간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 공간이 주는 제약을 넘어서 마음대로 살기 위해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지니지 못한 초능력을 얻어서 더 뽐내며 살겠다는 신앙인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지니고, 그들과 더불어 삽니다. 하느님이 선하고 자비하셔서 신앙인은 선하고 자비로운 실천을 하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삽니다.
오늘 예수님이 받으신 세 번째의 유혹은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모든 사람이 누리고 싶은 부귀영화입니다. 예수님은 그 유혹도 한 마디로 거절하십니다.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는 이사야서(42, 1)의 구절을 인용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을 이용하여 의식주(衣食住)를 해결하고, 하느님을 이용하여 초능력을 발휘하며, 하느님을 이용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의식주는 우리 스스로 노력해서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에게 약속된 부귀영화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를 살려고 노력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은 주변의 모든 사람을 형제자매로 생각합니다. 형제자매 앞에서 인간은 자기의 우월함을 드러내고 그들을 압도하지 않습니다. 형제자매는 우리가 위해주고 도와주면서 더불어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탐스럽고 우리를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은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형제자매는 우리의 경쟁상대로 보일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빠지는 유혹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겪으셨다는 유혹은 우리가 일상생활 안에서 겪는 일들입니다. 재물을 탐하고, 남의 시선을 끌 수 있는 초능력을 탐하고, 부귀영화를 꿈꾸는 우리들입니다. 성서가 유혹이라고 말할 때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자기중심적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유혹들은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살고자 하는 사람이 가지는 마음입니다. 빵만 탐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 궁리만 하고, 부귀영화만 쫓아가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선과 악의 기준을 자기 안에 둔 사람이 찾는 것들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이야기 다음에 즉시 유혹의 이야기를 합니다. 신앙인은 재물이나 기적이나 부귀영화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것을 얻어내기 위한 신앙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을 이용하여 자기의 환상을 실현하지 않고,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이며, 하느님의 다른 자녀들인 형제자매를 섬깁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 그리스도인이 하는 일이라고 복음은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광야에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삶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가까웠던 사람의 배신, 감수할 수밖에 없는 각종 실패와 병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독 등은 우리가 겪는 광야입니다. 우리가 의지하여 편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너지고 사라진 상실(喪失)의 순간들입니다. 광야에서 40일을 단식하신 예수님과 같이 우리에게도 우리가 기진하여 허덕이는 광야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때에도 빵과 기적과 부귀영화를 꿈꾸지 않고, 하느님을 택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녀는 그분이 선하고 자비로우시다는 사실을 믿고 그것을 실천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재물, 능력, 부귀영화도 언젠가는 결정적으로 버리고 하느님에게 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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