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485) 제10처 예수님께서 옷 벗김 당하심을 묵상합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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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순의 | 작성일2011-03-16 | 조회수367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485) 제 10처 예수님께서 옷 벗김 당하심을 묵상합시다.
이순의
작년 봄,
사순시기에 완성하기로 했던 십자가의 길 기도를 완성하지 못하고 부활을 맞았고, 곧 산으로 옮겨 가야 했었다. 충분히 묵상도 했었고 완성도 가능했었다. 하지만 나의 껍질을 더 이상 벗겨 낼 용기가 없어서 그쯤에서 멈추어야 했을 것이다. 예전에! 지금보다는 조금 더 젊었던 날에는 그 젊음이 무기였고 배짱이었던지 주님과 대면하는 용기도 두둑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묵상글도 겁없이 완성했을 것이고, 그때만 해도 그만큼 또 순수하며 죄가 적었을 것이다. 인간의 죄가 나이에 비례한다는 것을 느낀다. 꼭 죄를 지으려고 하거나 지어서가 아니라 그냥 삶을 지탱하고 있는 인생이라는 연결고리들이 본의든 타의든 죄 안에서 극복되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모습을 홀라당 벗어 알몸으로 설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벗은 내 모습을 내가 볼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묵상으로는 <내 인생 중에서 십자가의 길목 어디 쯤이라면 지금이 제 10처 일 것이다. 내 인생 중에서 제 10처인 상태! 지금 나는 옷 벗김을 당하시는 주님의 길목에서 미소하나마 깨우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고 누누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능욕의 부끄러움을 내 스스로 마주 대할 용기가 없어서 사순시기의 십자가의 길 묵상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리고 여름이 가고 가을 겨울도 가고 다시 봄이 되었다. 재의 수요일이 지나고 사순 제 1주간이 진행중이다. 그 능욕의 부끄러움들을 들추고 싶지 않아서 마음을 닫고, 생각도 닫아버린 지금, 문득! 내 스스로 남겨 둔 흔적들이 궁금하여 돌아보러 왔더니......... 아! 쓰다가 말은 편지처럼....... 먼지 가득한 책상 위의 아쉬움들이 밀려 온다. 무슨 고집을 부리고 있는가?
재의 수요일에 미사참례를 하다가 몽둥이로 패는 것 같은 말씀 한 마디와 화두를 잡기는 했다.
< 하느님과 화해 하십시오. - 고린도2서 5,20->
<거룩함 보다 은혜를 헛되게 하지 마십시오. -김범연 신부님 강론 중에서->
말씀의 전례 그 단순한 시간 속에서도 나는 성경 한 줄과 신부님의 말씀 한 마디에 검은칠을 겹쳐 그리고 있었다. 그 짧은! 그럼에도 쾅 하고 도장처럼 내 마음에 찍히는! 묵상글을 적는 노트의 하얀 마지막 장이 끝나버려서 겉껍질에 붙은 종이에까지 써 내려간 순간에 찍힌 재의 수요일에 받은 내 안의 도장!
<하느님과 화해 하십시오. 거룩함보다 은혜를 헛되게 하지 마십시오.>
사실 나는 지금 인간과 화해 하지 못해서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이루어야 할 것은 인간과의 화해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화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용서 하라는 말을 더 많이 한다. 용서는 상대방이 청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것이 용서이다. 그러나 화해는 반드시 상대방과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것인데 상대가 없는 나 혼자만의 화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 화해를 못해서 분노를 하고 있었으니 하느님 보시기에 얼마나 답답하였을 것인가?! 그러니 말씀의 전례 여러 문장 중에서 몽둥이가 되어 날아 온 한 방을 얻어 맞을 법도 하였을 것이다.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내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에 친정아버지께서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이례로 31년 만에 여유라는 걸 맛보았다. 아직 서울 장안에 내 소유의 집 한 칸 없지만 그래도 이제는 밥을 떠 먹는 숟가락도 내것이고, 덮고 자는 이불도 내것이고, 목구멍으로 넘기는 밥 한 톨도 내것이 되었다. 돌아 보면 홀 시어머니에 줄줄이 시동생들에 주정뱅이 시작은 아버지까지 등짐으로 진 짝꿍을 만나서 꾸려낸 어려움은 하늘과 나만 아는 것이었다. 너무나 빈곤한 생활이었으니 도미노처럼 무너지지는 말자고 다짐하며 꾸려온 맏자식의 고뇌는 어려웠었다. 그 결심을 지키는 게 그토록 어려웠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부부는 그 다짐들을 어긋나게 살아 본 적이 없었다. 억대의 빚을 지고도 우리 부부만의 짐으로 지탱해 온 세월들이었다.
단 일원도 누구에게 전가를 한다든지, 손을 벌려 의지해 본 적도 없다. 그렇다고 짝꿍의 그늘에서 밥을 먹고 사는 시동생들의 인건비 중에 단 한 푼도 걸러본 적도 없고, 푼돈을 벌어 쓰시는 어머니의 약한 벌이를 넘 본 적도 없었다. 결심대로 살았으니 늘 곧은 대쪽처럼 심지가 굳었어야만 했다. 그 많은 식구들이 함께 어우러져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결심대로 살아냈다. 그러나 맏이의 그 궁핍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공격하고, 욕심부려서 무너 뜨린 사람들은 늘 시댁식구들이었고, 그 불편함 속에서도 짝꿍은 단 한 번도 내 편에 서본 적이 없었다. 여인에게 남편은 남의 편이라서 남편이라고 한다. 정말로 짝꿍은 남의 편이었다. 그러므로 남의 편인 짝꿍과 살아 오면서 내 자아와 시댁이라는 급물살 사이에서 충돌하고 고통받는 것은 언제나 내 몫이었다. 내가 먹을 몫이 많아서가 아니라 너무 부족한데, 내 자식 몫이조차 부족한데, 더 줄 수 없는 한계적 현실 앞에서 늘 양심성찰 해야 하는 처지 또한 내 앞의 고행이었다. 나의 25년의 삶은 내가 직접 지은 죄라기 보다 내가 가난 때문에 겪을 수 밖에 없는 수치와 수모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담을 그릇도, 걸친 옷도, 먹을 반찬 한 가지도, 다 내것이 되었다.
제일 먼저 한 일이 갚을 게 많은 사람은 갚을 것을 먼저 갚는 일이었고, 자연이라는 엄청난 복병앞에 극복이라는 힘을 실어주신 감사를 주님께 드리는 것이었고, 그 다음은 내가 마음 먹은 대로 짝꿍의 침대를 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리가 받은 적은 없어도 꼭 주어야만 하는 곳! 그곳에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취소 되었다. 취소를 하려고 해서 취소를 한 것이 아니었다. 짝꿍이 남편이 아니라 내편이 되어버린 것이다. 식구중에 우환이 생겼다. 그 우환이 큰 우환이고보니....... 얼마만큼을 주어야 할지에 대하여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짝꿍이 내편이 아니고 남편인데다 나도 심성이 욕심장이는 아니고 보니 어느만큼이라는 라인이 정하여지는 대로 나눌 요량이었다. 그런데 시댁 식구들은 참 이상하다. 그 곤궁한 맏아들의 시련이나 악재가 생길때는 어머니조차 등을 돌리면서 자기들이 무슨 일이 벌어지면 우리 부부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또 그 절차적 순번이 그대로 진행이 되었다. 그냥 가만히 두면 알아서 하련만.......
사람은 입이 방정이다. 25년동안이나 남편인 짝꿍이 내편이 되는 동기! 아주 단순하고 간단했다. 눈 감고 귀 막고 입 닫아버린 내 뒤에서 쌓아 온 누명들이 짝꿍의 귀에 흘러 들기 시작한 것이다. 내 입으로 억울하다고 아무리 변명을 해도 내편이 아니고 남편이었던 짝꿍도 25년의 진실은 알고 있었던가보다. 하나가 터지기 시작한 거짓들은 꼬리를 물었다. 아무리 짝꿍이 내편이 아니고 남편이라고 하더라도 25년이나 함께 동반해 온 사람의 삶의 모습조차 모른다고 생각했을까? 서슴없이 덮어 쒸어진 누명들이 너무나 쉽게 짝꿍의 귀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 거짓의 진원지가 그 우환을 감당해야 하는 쪽이었으니, 아마도 일가친척들은 그 거짓이 진실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그쪽을 도와준답시고 짝꿍이 다시 내게서 남의 편이 되게 하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맏이의 큰 실망은 고생으로 동반해 온 얼룩진 아내의 억울함을 변명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마음을 닫아버렸다. 57년을 지탱해 온 맏자식의 자리에서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닫아버렸다.
가끔은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말을 건네 보기도 한다.
<내가 가서 말아나 한 번 물어 볼께. 왜 그랬느냐고? 이유라도 한 번 들어보면 화라도 덜 날거 아니야? 내가 한 번 만나 볼께.>
그러나 짝꿍은 불호령을 내렸다.
<이제는 동생들도 보기 싫고, 어머니도 보기 싫어. 사람이 사람을 만나야지 사람도 아닌 사람을 만나서 뭐하게?>
그 진노는 격하기만 하다.
이것이 내가 다시 칩거에 든 이유이다. 주기로 한 것은 줘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짝꿍의 불호령에는 타당함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안 주자니 가장 가까운 이웃을 외면하는 것 같고, 주자니 짝꿍의 상처가 너무 크고....... 그러나 진짜 궁금하기는 하다. 한 번쯤 말이라도 해 보고 싶으다. 왜 그랬느냐고.
이렇게 사람의 문제가 나를 억압하고 짓누르고 있느라고 겨울이 가버렸다. 가끔은....... 달란트를 주었는데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둔 사람처럼 지금 내가 내 모든 것을 묻어두고 있지는 않은지 두려울 때도 있다. 지금 하늘의 부르심을 받는다면 한 달란트를 땅 속에서 꺼낼 용기나 있을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남편을 따라 사는 며느리라는 굴레와 타협하지 못하고 인간 안에서 몸부림 하고 있다. 살아보니 죄는 내가 지어서 짓는 게 아니고 사는 게 죄더라는 어른들의 사고를 배워가고 있다. 내 스스로 내 인생에서 내 옷을 벗기는 대목이기도 하다. 내가 아무리 옷을 단단히 입는다 한들, 거짓인 너의 죄와 억울한 나의 죄가 무관심이라는 우리의 악행이 되어 가만히 있어도 들춰지는 그런! 주님께서 친히 옷을 벗지 않으셨어도 벗겨지고 갈기갈기 찢겨져 서로 나누어 가진! 그 때를 맞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젊은 어느 날처럼 이제는 그 억울함에 대하여 짝꿍의 귀에 대고 확성기처럼 말하지 않아도 그 모습이 불쌍하다. 그 어머니와 그 동생들과 함께 살아 내느라고 마누라 이겨 먹던 모습은 다 어디로 가고 저 사람도 옷 벗김을 당하는가?
넘어지고 일어나고 사람들을 만났던 십자가의 지나 온 길은 아무것도 아닐만큼! 이제야 십자가의 진정한 길이 사작되고 있다. 나의 지난 세월들이 들춰지고 그 통회로 능욕을 참아야 할 일들이 어데 남편 뿐이고, 시댁뿐이겠는가?! 더 많은 날들과 더 많은 인연들과 더 많은 사심들 속에 시작 된 사는게 죄인인 나를 옷벗겨야 한다. 그러니 신부님께서는 재의 수요일 사순절의 시작을 거룩함 보다는 은혜를 헛되게 하지 마라고 당부 하시지 않았겠는가?! 반 백년을 살아 본 인생길에서 이제는 인간이 아닌 하느님과 화해 하는 삶을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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