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참 크고, 깊고, 고요한 성 요셉" - 3.19,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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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11-03-19 | 조회수476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1.3.19 토요일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사무7,4-5ㄴ.12-14ㄱ.16 로마4,13.16-18.22 마태1,16.18-21.24ㄱ
"참 크고, 깊고, 고요한 성 요셉"
오늘은 저희 수도원의 주보성인인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1987년 3월 19일 성 요셉 대축일에 개원해 오늘로 만 24세가 된 청년 수도원입니다. 대개 분도수도원의 이름은 그 지역 명칭을 따라 부르는데 우리는 주보성인 그대로 요셉수도원이라 부르는데 이 또한 섭리입니다. '화접’, ‘별내’ ‘남양주’ ‘불암’등 여러 명칭을 생각한 끝에 ‘요셉’으로 명명했다 합니다.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이니 마치 형제와도 같은 성 요셉과 성 베네딕도를 양쪽에 수호성인으로 모신 복된 우리들입니다. 성 베네딕도회의 ‘기도하고 일하라.’는 모토대로 평생 성가정의 수호자 되어 정주의 삶을 살았던 요셉 성인은 그대로 우리 분도수도승 삶의 모델입니다. 두 분 다 큰 배경의 산 같은 분이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버지상이 이 두 성인들을 통해 참 잘 들어납니다. 아버지의 권위가 실추되어 가는 세상에 참 아버지상을 보여 주는 두 성인입니다. 예전 어둠에 짙어져가는 저녁 불암산을 보며 쓴 글이 생각납니다.
“참 크다 깊다 고요하다 저녁 불암산”
짧은 글이었지만 많은 이들이 공감했습니다. 산을 통해 즉시 하느님을 생각했고 성 요셉을 생각했습니다. 한없이 크고 깊고 고요한 하느님을 닮은 성 요셉입니다. 성 요셉의 영성을 셋으로 요약하면 ‘크다’ ‘깊다’ ‘고요하다’ 세 동사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크고 깊고 고요한 산 같은 모습의 삶을 추구하는 요셉수도원의 수도승들입니다.
요셉 성인은 고요한 분이셨습니다.
결코 시끄러운 분이 아니셨습니다. 고요함 또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성인은 고요한 중에 하느님의 뜻을 찾았던 분입니다. 침묵의 사람이며 인내의 사람, 기다림의 사람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시끄러우면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안팎으로 시끄러워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주님의 뜻대로가 아닌 내 뜻대로 처리해 버리는 일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 끝없이 말을 해야 하는 것 현대인의 영적 질병으로 내적 불안과 두려움의 반영입니다. 고요한 침묵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들었던 요셉 성인은 얼핏 보면 어리석은 분 같으나 참으로 지혜로운 분이셨습니다. 大愚가 大智라는 역설이 그대로 통하는 분으로 한자로 이름을 짓는다면 大愚라 하고 싶은 분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도 자신을 바보라 하셨지만 요셉 성인은 말 그대로 큰 바보 같은 분이셨습니다. 참으로 들어나기를, 들어내기를 좋아하지 않았던 겸손하고 고요한 분이셨습니다. 1독서의 나탄 예언자가 고요한 중에 주님의 말씀을 들었듯이 요셉 성인 역시 마침내 고요한 밤 침묵의 기도 중에 천사를 통해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답입니다. 기도 없이 어디서 이런 하느님의 답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답을 찾지 못하는 것은 고요 중에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요 중에 활짝 열리는 마음의 눈이요 마음의 귀입니다.
요셉 성인은 깊은 분이셨습니다.
결코 얕은 분이 아니셨습니다. 좋은 산은 높은 산이 아니라 깊은 산이라 합니다. 사람 역시 높은 사람이 아니라 겸손의 깊은 사람이 좋습니다. 깊은 사람은 늘 봐도 좋지만 얕은 사람은 곧 실증이 납니다. 하느님을 닮아갈수록 깊은 사람입니다. 깊은 사람은 마음이 참으로 깊고 넓은 지혜로운, 또 한없이 너그럽고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바로 요셉 성인이 그런 분이셨습니다. 좁은 땅의 외적공간에서 깊고 넓게 살 수 있는 길은 마음을 깊고 넓게 하는, 즉 내적공간을 넓히는 일뿐이 없습니다. 이래야 원활한 공동생활입니다. ‘있는 그대로’ 현실을 받아들여야 살지 바꾸려하면 못삽니다. 그러니 환경을, 남을 바꾸려 할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깊고 넓게 바꾸는 것이 우선입니다. 오늘 복음의 요셉 성인이 그 모범입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가련한 마리아의 처지를 공감, 배려하는 요셉의 깊고 넓은 마음입니다. 이어 천사를 통해 주님을 말씀을 들은 후 요셉의 즉각적인 순종이 감동적입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있는 그대로의 마리아를, 자기에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순종으로 받아들인 요셉 성인의 참 깊고도 넓은 마음입니다. 고요 중에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을 찾을 때 저절로 깊어지고 넓어지는 마음입니다. 날로 얕고 가벼워지는 천박한 세상에 마음도 삶도 얕고 가벼워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실 중심이 얕고 가벼우면 주변이 시끄럽지만 중심이 깊고 무거우면 주변이 고요하고 평화롭습니다. 요셉 성인의 성가정이 어려운 안팎의 환경 중에도 안정과 평화를 누렸던 것도 성인의 깊고 고요한 영성 덕분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깊고 고요한 겸손과 순종의 사람을 당신 도구로 쓰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요셉 성인은 큰 분이셨습니다.
성인은 꼭 수도원의 배경인 불암산 같은 분입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처럼 보이지 않는 배경의 하느님을 닮은 참 큰 분이셨습니다. 성 가정의 배경이 되어 없는 듯이 사셨던 참 큰 배경의, 큰 믿음의 성인이셨습니다. 푸른 하늘을 배경한 불암산처럼 늘 하느님을 배경한 큰 믿음이 있었기에 아브라함처럼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평생 성가정의 수호자로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하여 나탄을 통한 주님의 약속이 요셉의 큰 믿음 덕분에 그 아드님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사실 예수님에 가려, 성모님에 가려 배경의 성 요셉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성경이나 전례를 봐도 요셉 성인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요셉 수도원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눈 들면 배경의 불암산이 보이고 불암산을 잘 들여다보면 배경의 푸른 하늘이 보이듯, 예수님과 마리아를 잘 들여다보면 큰 산과 같은 배경의 요셉성인이 보이고 그 뒤 푸른 하늘같은 하느님 배경이 자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배경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성 요셉이 없는 성 가정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음은 첩첩의 산들 같은 다음 배경 덕분입니다. 성인들의 배경, 예수님의 배경, 교회의 배경, 수도원의 배경, 하느님의 배경 무수한 배경들과의 관계에서 투명하게 들어나는 우리의 신원이자 정체성입니다. 이런 배경들 없이는 정체성의 실종입니다.
참 크다, 깊다, 고요하다 그대로 요셉 성인의 영성을 요약합니다. 여기 수도원 입구의 성모자상과 주차장의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요셉상에서도 이런 성인의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고맙게도 산같이 크고 깊고 고요한 믿음과 겸손, 순종의 사람 요셉 성인을 교회의 수호성인으로 삼으셨고, 동정 마리아와 더불어 우리 한국교회의 공동수호자로 삼으셨으며, 우리 수도원의 주보성인으로 삼으셨습니다. 입당송과 영성체송이 그대로 요셉 성인의 덕을 실감나게 묘사합니다.
“보라, 주님은 당신 가족을 맡길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을 세우셨다.”
“잘 하였다, 착하고 충실한 종아!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요셉 성인을 닮아 크고 깊고 고요한 믿음과 마음으로 성가정 공동체를 이루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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