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신을 낮추는 비하 (humiliatio) 나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겸손 (humilitas) 이나 모두 ‘흙 (humus)’ 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흙은 사물의 마지막 모습인 동시에 첫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처음과 마지막에 대해 요한묵시록은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 (묵시 1, 8; 21, 6; 22, 13) 라고 증언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을 창조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손에 드셨던 첫 흙이며, 완성하시는 마지막 흙으로서의 마음을 지니신 분입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필리 2, 6-8) 이렇게 비하나 겸손은 모든 것의 꼭지인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합니다. 마침내 성자께서 성부 오른편에 앉으신 것처럼 사람을 하느님께 이르게 합니다.
자신을 낮출 줄 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고, 자신을 하느님 안에서 완성시키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순례는 자신이 부서지고 녹고 사라지는 여정을 거치게 됩니다. 세월 속에서 큰 바위가 더위와 추위를 겪고 비바람을 맞으며 작아질 대로 작아지고 가난해져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먼지가 되듯, 사십 년간 광야를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할 여정이 있습니다.
윤인규 신부(대전교구 버드내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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