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they will not listen to Moses and the prophets,
neither will they be persuaded
if someone should rise from the dead.
(Lk.16.31)
제1독서 예레 17,5-10
동창회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서로의 근황을 묻고 있었습니다.
“야, 넌 요새 무슨 일 하냐?”
이 물음에 그 친구는 뻔하지 않느냐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 그냥 전에 하던 거 계속하고 있지 뭐.”
“그래? 그런데 니가 전에 뭐 했더라?”
그러자 자신 있게 이렇게 말하네요.
“놀았잖아.”
남들과 비교하면서 스스로 위축될 때가 많습니다. 또한 스스로 실패자라고 하면서 심한 자책과 함께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도 보입니다. 하긴 이러한 말도 있더라고요.
20대가 취직하면 가문의 영광, 30대가 직장 다니면 동네 잔치할 일, 4,50대가 아직 퇴직 안했으면 국가적 경사, 60대가 아직도 은퇴 안했으면 세계 8대 불가사의.
그러나 이런 모습은 어디까지나 순간일 뿐입니다. 실패의 삶이 계속될 것이라는 생각은 자기가 만든 감옥 속에 스스로 갇히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들은 언제든지 주님 안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 시간이 아직 오지 않았음을 어쩌면 이미 왔는데 내가 둔해서 아직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포기와 좌절 속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 안에서 희망을 두면서, 주님과 함께 행복의 길로 걸어가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라자로의 이 세상 삶은 어떠했습니까?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최악의 상황처럼만 보입니다. 그러나 고통과 시련은 죽음 이후의 삶에서는 완전히 역전이 되고 맙니다. 아브라함 곁에서 참 행복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에 반해서 부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여유 있는 생활을 했습니다.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던 부자였지만, 죽음 이후의 삶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역시 상황이 역전되어 불길 속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지낼 수밖에 없었지요. 따라서 우리는 오늘 독서의 이 말씀을 가슴 깊이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바로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만이 참된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또한 좌절도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희망을 간직하며 힘차게 앞으로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 모습을 갖춘 사람이 바로 내가 되도록 합시다.
한 사람이 외적으로 행하는 모든 것은 그의 내적 사고의 표현이자 완성이다. 효율적으로 일하려면 생각이 분명해야 하고, 품위 있게 행동하려면 생각이 훌륭해야 한다(윌리엄 엘러리 채닝).
장례식장에서 검시관이 죽은 시신을 하나하나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구의 시신을 보는 순간 그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시신들의 얼굴을 보면 빙그레 웃는 표정이었거든요. 이 사람은 무엇을 하다가 죽었는데 이렇게 웃다가 죽었을까? 궁금했습니다.
원인을 조사해 보았더니 첫 번째 사람은 너무 가난하게 살았는데 로또 복권을 사서 당첨이 되었습니다. 몇 십억을 벌게 되었으니 너무 좋아서 웃고 춤추다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 사람 역시 빙그레 웃고 있었는데 조사를 해 보니 아들이 3년간 재수를 했는데 3년 만에 서울대에 합격을 해서 너무 좋아서 춤을 추다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세 번째 시신도 “히~” 하고 웃고 있습니다. 조사를 해보니 번개를 치는데 누가 자기를 사진 찍어 주는지 알고 “히~” 하고 웃다가 벼락에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웃어넘길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문득 이 이야기를 보면서, 누구나 이렇든 저렇든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떠올리게 됩니다.
인류의 역사가 수천 년을 지나오면서 수백억의 인구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다시 떠났습니다. 그런 중에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났고 세월이 흐르면 언젠가는 우리 역시 조상님처럼 이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문제는 모두가 언젠가는 떠날 것인데,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산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살다가 어느 날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죽음을 잘 준비하고 사는 것일까요? 먼저 살다가 떠나가신 조상님들이나 우리 믿음의 선배님들이 지금 우리에게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오늘 복음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입니다. 라자로는 살아 있을 때 아주 비참한 생활을 하였고, 부자는 반대로 부유하게 살면서 부족한 것이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죽어서 부자와 라자로의 처지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그렇다면 부자가 큰 죄를 지었을까요? 라자로는 단순히 가난하게 살았던 이유만으로 죽어서 복을 누리는 것일까요?
그것만은 아닙니다. 우선 라자로는 비참한 생활 가운데에서도 어떤 원망이나 불평이 없었습니다. 개들이 그의 종기를 핥을 정도로 그는 무력했지만,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하느님께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즉, 그는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말없이 하느님을 신뢰하는 가난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에 반해서 부자는 죽음의 세계에 들어서서 고통을 받자마자 소리를 질러 아브라함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정도가 라자로하고는 현저하게 차이난다는 것이지요.
또 한 가지는 부자의 무관심이었습니다. 자신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바랐다는 내용의 성경 말씀으로 보아, 부자 곁에 라자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라자로를 돕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갓 동물인 개가 그를 핥아도 가만히 놔두는 무관심을 보입니다.
죽음에 대한 준비는 바로 사랑에 있었음을 복음에서는 말해줍니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깊은 사랑, 그리고 이웃에 대한 따뜻한 관심이 담긴 사랑. 그 사랑의 크기로 인해 죽음을 잘 준비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내 사랑의 크기는 과연 얼마만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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