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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진묵상 - 전여사께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11-03-24 조회수548 추천수7 반대(0) 신고
 
 사진묵상 - 전여사께
                                                  이순의
 
 

 
 
전여사.
참! 전여사께 이런 빚을 지게 될 줄을 몰랐습니다.
가끔 아주 가끔
1년에 한 번이나 두 번 정도 겨우
짝꿍이 남기고 출근한 분실물들을 챙겨다 주러
깊은 밤의 시장거리에 외출을 하였지요.
그때마다 그렇게 작은 체구의 전여사는 저를 알아보고는
<언니.>라고 부르며 다가오셨지요.
늘 전여사의 손에는 때 구정물에 진창이 된
헝겁조각들이 바늘과 실에 연결이 되어 들려 있었지요.
어느 때는 근사한 명필의 한문서체가 들려있기도 하고
어느 때는 동양화 한 폭이 들려 있기도 하고.
 
그게 뭐냐고 물었을 때에야
십자수라는 걸 알게 되었지요.
 
저녁 내내
잠 한 숨 안자고
콘크리트 시장바닥에 서서
물건을 파는 전여사께서
그 틈바구니 어느 틈을 비집고 십자 수를 놓는 모습이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 흙먼지의 때 국물 묻은 천 조각이
빨아져서 깨끗해질 것 같지도 않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모처럼 만난 전여사는 제가 듣지 말아야 할 약속을 하시 더이다.
<언니, 내가 성모마리아 수 놓아서 줄게. 기다려 봐.>
그 말씀이 헛말이기를 바랬습니다.
전여사의 생활실정을 너무나 잘 아는 저로서는
그 성모마리아를 모시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짝꿍에게 묻곤 하였지요.
<여보, 전여사 손에 성모님 십자수가 들려 있어요?>
그때마다 짝꿍의 대답은 아닌 것 같다고 하더이다.
그래서 안심을 하였지요.
그냥 말로만 해 본 소리이기를 바랐으니까요.
 
그 십자수 놓을 시간이면 눈이라도 잠깐 감았다가 뜨기만 해도 휴식이 될 것이고
그 십자수를 놓을 시간이면 어깨라도 한 번 돌렸다가 놓으면 혈액순환이라도 될 것이고
밤잠 안자고 생활하는 시장사람들의 고통을 너무나 잘 알기에
더구나 성당에도 다니지 않을 뿐더러 다닐 수도 없는 전여사의 입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신앙인의 상징이며
기도자의 모범이신 성모님을 전여사께서 수를 놓아 주신다면
그 마음의 짐이 상상이 되지 않더이다.
그런데 다행히
짝꿍이
<성모님 십자수는 놓지 않는 것 같든디.......> 라고 대답해 주어서 잊었더랍니다.
그리고 해가 두 번쯤 바뀌었을까요?
 
지난 가을에 산에서 내려 왔더니
전여사께서 많이 아파 수술도 하시고 입원도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문병을 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갈 수가 없었습니다.
일가 중에서 우환이 생기기도 했고
시어머니께서 제게 어떻게 등을 돌리셨든지
그 어머니께서 험한 꼴을 보시게 되셨으니
제 입장에서는
자중하고 근신하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가장 가까운 일가를 두고
먼 전여사의 문병을 갈 수 없었습니다.
짝꿍은 전여사를 뵙고 오라고 했지만 제가 가지 않았습니다.
제 양심이 살아 온 방식이니까요.
 
그런데
퇴원을 하자마자 전여사는 택시를 타고 나타났습니다.
택시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아파트 앞마당에서
선물 하나 들려주고는 그 택시 그대로 갔습니다.
집으로 들어와 펼쳐보니
그토록 부담스러운 선물이 너무나 곱게 제게 왔습니다.
전여사의 손으로 한 땀 한 땀 놓은 십자수의 성모님!
<아! 또 이렇게 누군가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졌구나!>
 
제가 전여사와 똑같은 인생길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십자수를 놓아서 돌려드리지 않는 한!
이 선물이 주는 빚은 갚을 길이 없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자리를 잡아 걸어 모셨습니다.
집에서 제일 좋은 자리이니
십자수 성모님은 자주 만나게 되고,
매 번 전여사를 기억하게 되더이다.
그리고
유난히도 길었던 겨울이 가고,
엊그제는 산골의 해동상태를 보러 갔다가 왔습니다.
아직도 하얀 눈이 수북하고
가던 날에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기는 했어도
금방 녹아 없어지는 걸 보며
아직은 겨울이지만 곧 봄이 오실 것이라는 예감을 느끼고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현관에 섰더니
십자수 성모님께서 저를 맞으시더이다.
<아! 축성해야지! 축성해 드려야지!>
 
오늘 미사에 십자수 성모님을 모시고 성당에 갔습니다.
옆에 모시고 미사에 참례하다 보니
이 미사가 전여사를 위한 미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전여사가 이런 기도를 받고 싶었을까요?
전여사가 이런 관심을 받고 싶었을까요?
 
미사 내내 전여사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신앙인의 상징이 무엇인지도 모르실텐데
기도자의 모범이 어떠한지도 모르실텐데
그래도 지향이 앞서더이다.
미사성제의 합당함이 주시는 이 성사적 은총이
십자수 성모님과 함께!
또한 전여사와 함께!
 
제가 가장 가까운 이웃의 우환으로 인하여
아무리 절제와 칩거에 버금가는 마음 생활을 하여도
성당에 헌금하는 것을 욕되게 말하였고
신앙인이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헌신의 덕들을
무슨 이유로 그같이 치욕스럽게 덮어 씌우려 한!
그 일가를 위한 기도보다
더 절실한 마음을 가능케 한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전여사!
시장바닥에서 만나
전여사의 삶의 여정은 잘 모르오나
제가 전여사에게 해 드린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이렇게 과분한 선물을 받고 보니
저도 사람인지라
일부러 생각하여 쏘지 않아도 화살기도가 쏘아지더이다.
제가 십자수 성모님을 대할 때마다
기도로 갚아 드리는 수 밖에요.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십자수 성모님과 함께
또한 전여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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