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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되찾은 아들의 비유 - 송영진 모세 신부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11-03-26 조회수514 추천수8 반대(0) 신고
 
 
 
 
<사순 제2주간 토요일>(2011. 3. 26. 토)(루카 15,1-3.11ㄴ-32)

 

<되찾은 아들의 비유>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내용의 흐름만을 단순하게 따라가면서 읽을 이야기가 아니고

전체 상황을 입체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3D 영화를 감상하듯이 읽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버지와 큰아들과 작은아들의 입장을 모두 파악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등장인물 하나만 따라가다 보면

그 인물의 시선에서 판단하는 것으로 그치기 쉽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는 말을 생각하게 됩니다.

두 아들 모두 사랑하는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방탕한 아들이고, 하나는 성실한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작은아들도 아버지의 속을 썩이고,

큰아들도 아버지의 속을 썩이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작은아들 때문에 속이 상하고, 큰아들 때문에 슬퍼합니다.

작은아들을 동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큰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심정은?

 

큰아들 입장에서는 온통 억울한 일뿐입니다.

동생 때문에 화가 나고, 아버지 때문에 더 화가 납니다.

그는 무슨 집구석이 이 모양이냐고 화를 냈을 것입니다.

큰아들은 죄를 지은 동생도 이해가 안 되고,

그 동생을 받아주는 아버지도 이해가 안 됩니다.

큰아들의 모습은, 죄인에게 용서와 자비를 베풀기 전에 먼저

정의와 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작은아들의 입장은 더욱 복잡합니다.

(집 나간 아들 말고, 돌아온 아들이 복잡하다는 것입니다.)

집을 나갈 때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했으니 복잡할 것도 없지만,

회개하고 돌아온 다음에는 이게 보통 복잡한 상황이 아닙니다.

벌을 받을 각오를 하고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벌을 주기는커녕 잔치를 베풉니다.

과연 작은아들이 감격하고 기뻐하기만 했을까?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면서 더 불안해지지는 않았을까?

과연 편안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을 수 있었을까?

 

그런데 잔치 중간에 아버지가 나갑니다.

하인이 작은아들에게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큰아들이 화를 내면서 안 들어오려고 해서 아버지가 달래려고 나갔다고...

작은아들은 더욱더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심정이 될 것입니다.

이제 작은아들은 형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합니까?

 

큰아들이 끝끝내 화를 풀지 않는다면,

작은아들이 집에서 사는 나날의 삶은 생지옥으로 변할지도 모릅니다.

객지에서는 배가 고파서 고생한 것뿐이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형 때문에 늘 불안하고,

날마다 형의 눈치를 보면서 살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작은아들은 이렇게 사느니 도로 나가자, 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복음말씀을 보면

집에 돌아온 다음의 작은아들의 생각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 아버지가 큰아들을 타이르는 말 다음에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야기를 갑자기 끝내셨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입니다.

큰아들은 아직도 화를 내면서 작은아들을 죄인 취급하고 있고,

작은아들은 날마다 불안한 모습으로 고양이 앞의 쥐 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고,

그런 두 아들을 보는 아버지는 슬퍼하고 속상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우리 사회의 모습이고, 우리 교회의 모습입니다.

정말로 답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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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 발 물러나서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생각하면 탈출구가 보입니다.

우선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큰아들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하신 것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큰아들처럼 차갑기만 한 그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반성해보라고 하신 이야기입니다.

사실 큰아들은 잘한 것이 없습니다.

작은아들은 ‘집 나간 아들’이고, 큰아들은 ‘나가고 싶어 하는 아들’일뿐입니다.

아버지 앞에서는 둘 다 죄인입니다.

그래도 작은아들은 ‘돌아온 아들’이 되었지만,

큰아들은 집 밖에서 화만 내면서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 아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큰아들이 집나간 아들이 되었습니다.

 

큰아들이 작은아들을 ‘용서’해야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야기가 해피 앤딩으로 끝나려면 큰아들이 ‘회개’해야 합니다.

자기가 동생보다 잘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같은 죄인의 입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동생과의 형제애가 회복될 것입니다.

 

그러면 작은아들은 이미 회개했고 돌아왔으니 끝난 것일까?

아닙니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회개를 멈추면 안 됩니다.

아버지는 벌을 주지 않았지만, 작은아들 자신이 스스로 보속해야 합니다.

집을 나가서 방탕하게 살았으니

이제는 집에서 성실하게 일하면서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그의 회개가 진정한 것이었음이 입증될 것입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이 그렇게 할 때까지 계속 기다릴 것입니다.

 

자, 다시 생각해봅니다.

누가 감히 자기는 죄가 없다고, 회개할 일이 없다고 큰소리칠 수 있습니까?

자기는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읽을 때, ‘되찾은 아들’은 곧 작은아들이라는 생각만 합니다.

그러면서 아버지와 작은아들만 바라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행동을 보면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을 찾으러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큰아들은 찾으러 갔습니다. 큰아들이 더 위험했기 때문입니다.

작은아들이 되찾은 아들이라면, 큰아들은 되찾아야 하는 아들입니다.

성경에 이 이야기의 제목이 ‘되찾은 아들의 비유’로 되어 있는데,

예수님의 의도를 생각한다면

이 이야기의 제목은 ‘되찾아야 하는 아들의 비유’가 되어야 합니다.

 

자, 지금 우리는 죄를 지었지만 다시 돌아와서

아버지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작은아들입니까?

아니면 세상이 뭐 이러냐고 불평하면서 집 밖에서 화만 내고 있는 큰아들입니까?

누가 더 아버지를 슬퍼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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