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le he was still a long way off,
his father caught sight of him, and was filled with compassion.
He ran to his son, embraced him and kissed him.
(Lk.15.20)
제1독서 미가7,14-15.18-20
어느 가난한 시골 교회의 주일학교에서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교리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한참을 설명하고 있는데 한 꼬마 아이가 손을 들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하느님께서는 아마 어떤 사람은 기억하고 어떤 사람은 잊어버리고 계신가봐요. 그러니까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옷도 누더기를 입고 아주 작은 집에서 살아야 하지요.”
그때 또 다른 아이가 벌떡 일어섭니다. 앞서 일어난 아이보다 더 형편없는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 꼬마 아이의 집은 더 가난하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지요. 그러나 이 아이의 말은 앞선 아이의 말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기억하고 사랑하신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좋은 부모님을 주셨고, 행복한 가정을 주신 것이 아닐까요?”
여러분들은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살고 계십니까? 앞선 아이들은 거의 비슷한 집안 형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받아들이는 하느님의 모습은 각자 큰 차이가 있었지요. 어렵고 힘든 집안 형편 안에서 하느님께서 사랑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아이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아이 중에서 누가 더 행복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는 사랑 그 자체이심을 탕자의 비유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작은 아들은 큰 죄를 지었지만, 아버지께서는 그 작은 아들을 당신의 사랑으로 받아주십니다. 바로 이렇게 죄인을 사랑으로 받아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느님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등장하는 큰아들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처사에 몹시 화가 났습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하는데, 아무런 벌도 주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 잔치까지 차려준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나 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오늘 복음의 시작에 나오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기본 원칙은 “죄인들과는 아무것도 같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죄인들과 율법을 더럽힌 사람들은 격리되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세리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음식을 함께 먹는 예수님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사람을 판단하고 미워하고 단죄하는 심판의 영역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그 영역은 하느님의 고유 영역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유 영역을 빼앗으면서 살려는 사람들은 결코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모습 안에서는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판단하고 미워하고 단죄하는 심판의 영역에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언제나 사랑과 용서로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가 있으며, 그래야 행복해질 수가 있습니다.
타인과 교제함에 있어 그들에게 상응한 태도로써 대한다면 그들을 보다 나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상대방을 실제보다 더욱 뛰어난 사람으로 대해 준다면 우리들은 타인을 보다 나은 인간이 되도록 인도해 주는 것이 된다.(필립 체스터필드)
그저께 가정 방문 중 한 형제님과 컴퓨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즉, 요즘 컴퓨터 산업이 워낙 빨리 발전을 해서 따라가기가 힘들다는 이야기였지요. 그러면서 이 형제님께서 인터넷 고스톱을 예를 드시더군요. 얼마 전, 인터넷 고스톱에 접속하니까 자동으로 설치되는 프로그램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불과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새 버전이 나왔다면서 새로운 프로그램이 설치되는 것을 되면서 컴퓨터 계통이 얼마나 빨리 발전하는지를 알겠다는 말씀이었지요. 재미있는 예이고, 공감이 가는 예이기에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웃으면서 공감을 했지요.
사실 인터넷 고스톱에서 새롭게 바꿀 것이 뭐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고스톱 룰이 매번 바뀌는 것도 아닐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자주 새로운 버전이 등장하고 새롭게 프로그램이 설치됩니다.
컴퓨터 계통만 이렇게 빠른 변화를 보이는 것이 아니지요. 어쩌면 이 세상 전체가 빠른 변화를 보이고 있습니다. 생각을 해보세요. 불과 10년 전, 20년 전과 비교했을 때, 이 세상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를…….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발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비해서 우리들은 잘 변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계속해서 미워하고, 판단하고, 단죄하는 우리들의 잘못들을 떠올려 보세요. 과거에 비해서 진전이 좀 있었을까요? 어쩌면 그러한 잘못들이 계속 누적되어 변화되지 못하고 더욱 더 완고한 마음만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고해성사를 볼 때면 어떻습니까? 매번 과거의 잘못과 죄가 반복되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 이 부분은 저도 예외가 아니지요. 하나라도 줄여보려고 노력을 했지만, 고해성사를 볼 때면 여전히 똑같은 잘못과 죄를 반복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변화되지 못하는 우리들을 향해서 주님께서는 오늘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즉, 하느님 아버지께서 이렇게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 역시 자비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오늘 복음에서 등장하는 큰 아들의 모습만을 여전히 취하면서 내 이웃에 대한 미움과 단죄를 반복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기의 재산을 탕진한 작은 아들을 따뜻한 품으로 안아주는 아버지의 모습에는 전혀 관심 없어 하는 우리들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범하는 가장 큰 오류는 ‘나는 작은 아들이 아니다’라는 착각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늘 큰 아들의 모습만 취할 뿐이었습니다.
이제 내가 작은 아들의 입장이 되었을 때를 떠올려 보세요. 그때 하느님께서 큰 아들의 생각처럼 “여기가 어디라고 다시 찾아오고 그래? 당장 나가!”하면서 쫓아낸다면 어떨까요?
이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변화에 발맞추어야 하듯이,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용서와 사랑으로 나도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제1독서의 말씀처럼 주님께 기도해야겠습니다.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Waterf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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