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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회개와 용서" - 3.29,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1-03-29 조회수482 추천수6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1.3.29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다니3,25.34-43 마태18,21-35

 

 

 

 

 

"회개와 용서"

 

 

 

아침 성무일도 시 요엘서의 다음 대목이 사순시기를 정의합니다.

 

“너희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라.

  주는 너그러우시고 자비하시다.”

 

비단 사순시기뿐 아니라

우리의 전 삶이 하느님께 돌아오는 회개의 여정이자 용서의 여정입니다.

끊임없는 회개와 용서의 여정을 통해

너그러우시고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아갑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회개와 용서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이래야 아름다운 선종의 죽음입니다.

몇 감동적인 일화를 소개합니다.

 

정양모 신부님(77)의 고백입니다.

 

“나는 예수님보다는 배도 더 살았고 공자보다도 더 오래 살고 있지만

  여전히 인생은 찰나처럼 느껴진다.

  유수와 같은 세월이 아니라 화살처럼 날아가는 세월 같다.

  프랑스 소설가 조르주 베르나노스가 1936년에 쓴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의 주인공 신부가 숨을 거두면서 발설한

  사세구를 닮았으면 좋겠다.

 ‘아무렴 어떤가, 세상만사 은총인 것을!”

 

천상병 시인의 고백 같은 시 귀천의 마지막 연도 생각이 납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20세기의 대철학자 비트겐쉬타인의 일화도 잊지 못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장에서

  그는 한 손에 <논리-철학 논고>를 집필하는 한편

  다른 손에는 늘 톨스토이의 책을 쥐고 있었다.

  삶의 의미는 자신의 실천적 일상에 충실한 사람에게만 들어난다는

  톨스토이의 가르침은 그의 생애에서 중요한 화두였다.”

 

한 손에 일을

한 손에는 삶의 의미인 하느님을 잡고 살았던

성실하고 진실한 구도자 비트겐쉬타인이었습니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직을 끝내 사임했는데

이유는 단 하나

대학교 교수이면서 정직한 인간이 될 수는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지막 사세구도 감동적입니다.

 

“좋습니다.

  그들에게 전해 주십시오, 내가 멋진 삶을 살았다고!”

 

다음 니체의 말도 깊은 묵상감입니다.

 

“무서운 깊이 없이 아름다운 표면은 존재하지 않는다.”

 

깊은 호수가 고요합니다.

깊이의 삶에 아름다운 선종의 죽음입니다.

끊임없는 회개와 용서를 통해 깊어지는 삶입니다.

망각과 무지는 함께 갑니다.

회개와 용서의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살기위해 끊임없는 기도가 필수입니다.

상처의 기억은 잊지 않는데 은혜는 잘 잊어버리는 게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의 백 탈렌트 빚진 이에게 무자비 했던 사람은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만 탈렌트 탕감 받은 은총의 사실을 망각했기에

이처럼 무자비하고 인색하고 옹졸했습니다.

만 탈렌트 탕감 받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용서 안에 살고 있는 자신을 상기했더라면

이처럼 무자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비의 샘이자 용서의 샘입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일곱 번씩 일흔 일곱 번의 무한한 용서가 가능한 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체험할 때 가능합니다.

하느님 앞에 서는 것은

죽음 앞에,

광활한 대양의 바다 앞에,

드넓은 창공의 하늘 앞에 서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하느님을 만날 때 자비로운 삶에 지칠 줄 모르는 용서입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얼마나 정체불명인지요.

너그러울 때는 하늘같지만

냉정할 때는 바늘구멍 하나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방법은 단하나 부단히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와 용서입니다.

이래서 끊임없이 바치는 우리의 공동전례기도(미사와 성무일도)입니다.

1독서의 말씀이 참 의미심장한 상징입니다.

 

“그 무렵 아자르야는 불 한 가운데 우뚝서서

  입을 열어 이렇게 기도하였다.”

 

붙타는 화덕이 상징하는바 세상이요 공동체요 내면입니다.

지옥이 연옥이 따로 없습니다.

탐욕의 불길, 분노의 불길, 두려움과 불안의 불길,

질투의 불길, 미움과 분쟁의 불길이 있는

세상이 공동체가 마음이

바로 불타는 지옥이요 연옥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불타 사라져 재만 남지만

기도할 때 영혼은, 믿음은 단련되어 순수한 금처럼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만이 온갖 불길 속에서도

하느님의 보호 안에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잊지 않고 살기위해,

세상 온갖 시련과 유혹의 불길 속에서

타버리지 않고 순수하고 견고한 영혼과 믿음으로 살기위해,

끊임없는 기도는 필수입니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바치는 아자르야의 가난하고 겸손한 회개의 기도를

그대로 우리의 기도로 바칠 때 풍성한 은총입니다.

 

“당신의 벗 아브라함,

  당신의 종 이사악,

  당신의 거룩한 사람 이스라엘을 보시어

  저희에게서 당신의 자비를 거두지 마소서.

  주님,

  저희의 죄 때문에

  저희는 오늘 온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번제물로 받아 주소서.

  주님,

  당신을 온전히 따를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을 따르는 이들은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이제 저희는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따르렵니다.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 얼굴을 찾으렵니다.

  당신의 호의에 따라,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희를 대해 주소서.

  당신의 놀라운 업적에 따라 저희를 구하시어,

  주님,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우리의 기도로 바쳐도 좋은 참 주옥같은 기도입니다.

자신은 물론 이스라엘 공동체를, 하느님을 위해 바치는

진실하고 장엄한 아자르야의 기도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께 돌아 온 우리를 용서하시고

너그럽고 자비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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