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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1-03-30 조회수901 추천수16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1년 3월 30일 사순 제3주간 수요일
 



Whoever breaks one of the least of these commandments
and teaches others to do so
will be called least in the Kingdom of heaven.
(Mt.5.19)
 
 
제1독서 신명4,1.5-9
복음 마태5,17-19

요즘 제가 성경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매주 목요일마다 성서40주간 강의를 2시간씩 해야 하다 보니, 시간만 나면 성경을 읽어야 하고 또한 각종 주석 책을 보면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묵상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되지요. 아무튼 요즘에는 성경 공부하고 묵상하느라 저절로 거룩하게 사는 것 같네요.

어제도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데 우연히 잠언의 한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너 게으름뱅이야, 개미에게 가서 그 사는 모습을 보고 지혜로워져라.”(잠언 6,6)

부지런하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가장 작은 곤충인 개미를 통해서 배우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잠언의 저자의 눈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보면 하찮게 볼 수 있는 힘이 없는 곤충인 개미, 그 개미를 계속해서 관찰하면서 개미에게도 배울 것이 있음을 발견했던 것이지요.

어제 하루를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많은 것을 보았으며, 또한 얼마나 많은 소리를 들었습니까? 또 내가 만진 것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아마 내가 맡은 냄새도 만만치 않게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안 먹고 살 수 없을 테니 또 입으로도 많은 것들이 들어가서 나의 혀를 즐겁게 해주었겠지요. 이렇게 수많은 것들이 나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생각했는지요?

조각가 로댕은 청년들과 산에 갔다가 길을 가로막고 있는 바위를 만났습니다. 청년들은 이 바위를 귀찮은 눈길로 바라보았지요. 그러나 로댕은 이 바위에서 인생을 고민하는 젊은이를 발견했고, 그래서 그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물이 끓는 주전자를 무관심하게 바라봅니다. 그러나 와트는 거기에서 증기기관차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번개가 치면 깜짝 놀라고 무서워 몸을 떱니다. 그러나 프랭클린은 그곳에서 어둠을 밝힐 전기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쥐를 징그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리 해고를 당해서 창고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던 월트 디즈니는 쥐를 보면서 평화와 자유의 상징인 미키마우스를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무심코 넘기는 곳에 대단한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도 하느님의 손길이 작용하고 있으니까요. 이는 하느님의 법, 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쯤이야’ 하는 생각들,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데’ 라는 안일한 마음들이 하느님을 나의 생활에서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힘주어서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지키고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계명은 별 것 아닌 아주 작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작다고 하는 세세한 계명까지 다 지키고 가르쳐야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오랜 친구가 좋은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 앞에서는 바보가 되어도 좋기 때문이다.(랄프 왈도 에머슨)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사실 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마셔도 얼굴을 비롯해서 온 몸이 새빨갛게 변하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또한 불편해서 술 마시는 것을 즐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술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술이 맛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술 맛 좋다’라고 하시는데, 저는 이 말을 이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술 맛이야 항상 쓰지 어떻게 좋은지……. 물론 달콤한 과실주가 있기는 하지만, 저는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단 맛을 내는 술이 맛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저에게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어제 점심 식사를 하면서 매운탕을 먹게 되었는데 바로 순간, 술 한 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했다는 자체가 너무나 신기하고 이러한 저의 모습이 우습기도 했습니다.

본당에 와서 교우들과 어울리면서 저녁마다 술잔을 기울이다보니, 이제는 술을 제가 먼저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가 된 것입니다. ‘술도 자주 그리고 많이 마시면 는다.’라는 이야기가 거짓은 아닌가 봅니다. 하긴 어떤 것도 노력해서 늘지 않는 것이 있을까요? 문제는 내가 늘 수 없다고 스스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술을 감정하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명 감정사가 되었을까요? 오랜 세월을 두고 매일 조금씩 감정을 하다가 술이 혀끝에만 닿아도 정확하게 판별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또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모든 악기의 음을 정확하게 구별하는 것은 하루 이틀의 노력으로 얻은 능력일까요? 아니지요. 끊임없이 듣고 들어서 정확하게 음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체험하는 것도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노력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주님을 체험하게 해달라는 것은 마치 아무런 연습 없이 명선수 혹은 명연주자가 되어 보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작은 계명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 바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을 조금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비록 오늘 복음 말씀에는 나오지 않지만, 바로 뒤를 이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악~~’ 소리를 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가장 열심한 사람들이 바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거든요. 그런데 그들보다도 더 능가해야지만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깜짝 놀랐을까요?

사랑의 노력은 아무리 해도 부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열심한 사람들이라고 지칭되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겉으로만이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의 실천을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 현재를 사는 내 자신은 과연 어느 쪽일까요? 겉으로도 열심하지 않은 것은 물론, 예수님의 말씀도 제대로 따르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A letter of 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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