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 kingdom divided against itself will be laid waste
and house will fall against house.
And if Satan is divided against himself,
how will his kingdom stand?
For you say that it is by Beelzebul that I drive out demons.
If I, then, drive out demons by Beelzebul,
by whom do your own people drive them out?
(Lk.11.17-18)
제1독서 예레 7,23-28
어제 어떤 분으로부터 메일 한 통을 받았습니다. 그 분께서는 메일에 어떤 글을 적어서 제게 보내주셨지요. 아마도 좋은 글이라고 해서 제게 보내주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글의 제목은 ‘사랑한다는 말은’으로 에세이의 형식을 띄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읽어 가는데, 내용이 참 좋습니다. 하지만 어디서 읽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더군요. 저는 ‘유명한 글인가 보다.’라는 생각을 가지면서 끝까지 천천히 뜻을 의미하면서 읽었습니다. 드디어 끝까지 읽었고, 맨 끝을 읽는 순간 저는 박장대소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맨 끝에는 이러한 글이 적혀 있었거든요.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희망가게(당신에게 행복을 팝니다)중에서”
맞습니다. 제가 2006년에 쓴 책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쓴 책인데도 불구하고 몰랐다는 것이지요. 얼마나 제 자신이 한심하던 지요.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이러한 부족함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솔직히 실수와 잘못 한 번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없지요. 또한 성공만을 계속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나아질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나만은 완벽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 빠질 때가 종종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나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분명한 사실에 대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는 ‘거짓’이라고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치는 것이, 바로 똥고집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인간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이 행동은 악마의 세력을 쳐 이기는 하느님의 손길을 부각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기적에 대한 반응으로 군중들은 ‘다윗의 아들 메시아’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이에 당황스러운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이 군중들의 생각을 역 설득하려고 예수님 기적을 악의 세력으로 돌리지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것입니다.
이는 어느 정도 설득력 있는 말로, 왜냐하면 그 당시 마귀를 쫓아내는 구마행위는 이교도들 사이에서 주로 성행했었고 그들의 행위는 베엘제불의 힘을 빌리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유다인들이 이교도들의 신을 경멸하여 부르던 명칭인 ‘베엘제불’이란 이름을 쓰는 것이었지요.
아마 사람들은 이 말에 크게 동조했나 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까지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탄이 사탄을 내쫓지 않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그들의 생각이 잘못 되었음을 꾸짖습니다.
악과 정반대편에 계신 예수님을 악의 자리에 위치시키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보다는 미움을, 용서보다는 다툼을 실천해 나간다면, 그래서 내 기준만을 내세워 내 이웃을 판단하고 단죄해 나간다면, 그 모든 모습들이 바로 예수님을 악의 자리에 위치시키는 큰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주님을 제자리에 모셔야 합니다. 즉 하느님의 자리에 모실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처럼 겸손해야 한다는 것……. 아시죠?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최대한 친절을 베푸세요.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의 차이(‘희망가게’ 중에서)
지금 제 노트북에는 많은 자료들이 입력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가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은 당연히 제가 써 놓았던 많은 글들입니다. 물론 한번 쓰고 나면 다시는 보지 않지만 정송껏 썼든 쓰지 않았든 상관 없이 제가 썼다는 이유만으로 노트북의 하드 디스키 용량을 채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제가 쓴 그 글들이 하드 디스크의 용량으로는 얼마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평화방송에서 마지막 녹음이 있는 날입니다. 작년 8월부터 시작해서 올 10월까지 '아침창가에서'라는 작은 프로를 진행해왔는데 어제 저녁 지금까지 이 프로를 위해서 써 왔던 원고를 살펴보았습니다.
1년 넘게 진행을 하면서 무려 400페이지에 달하는 원고가 모여졌지만 이 원고의 용량은 2M도 채 되지 않으면서 제 노트북에서 아주 작은 부분만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노트북의 입장에서 볼때도 제 원고 파일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단지 하나의 데이터 파일일뿐, 노트북을 움직아는데 꼭 필요한 파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나만 중요하다고 생각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혹시 나 스스로만 중요하다고 그래서 절대 놓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그 과정안에서 더 큰 상처와 아픔을 겪게 되는 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것은 그냥 놓쳐 버린채 지나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에게 소중한 것이라면 다른 사람에게도 중요하고 소중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