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우주의 불꽃춤과생태적 살림을 위한... 토마스 베리 신부의 성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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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송규철 | 작성일2011-04-01 | 조회수756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우주의 불꽃춤과 생태적 살림을 위한 토마스 베리 신부의 성찰
우주가 창발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현상적 세계에서 신성한 현존이 특별히 분명하게 자신을 현시하는 경우들과 같은 변모의 순간들을 식별해 내게 된다. 이 순간들에는 태양계와 행성 지구, 그리고 온 생명과 의식에 필요한 90여 개의 원소들을 낳은, 초신성의 폭발이 이루어진 때도 포함된다. 이같은 변모 사건들은 우주론적 은총의 순간들로 인식될 수 있다. 은총의 역사적 순간들이 있고, 은총의 성사적 순간들이 있는 것처럼, 바로 그와 같은 우주론적 순간들도 있는 것이다. Thomas Berry, The Christian Future and the Fate of Earth 7장: “Christianity and Ecology” Eds. Mary Evelyn Tucker/ John Grim (Orbis Books: 2009), 66
초신성 폭발들에서 별들의 자기-희생으로 첫 별들의 세대가 행성 지구를 만드는 데 필요한 요소들을 형성하였고 이어서 생명과 의식을 발생시켰다.
비생명체가 생명체로 변화되는 대변혁들에서도 존재의 한 단계에서 보다 더 영광스러운 실재를 낳는 데는 희생이 요청되었다.
그렇듯이 신적 존재는, 창조물들의 거친 다중을 발생시키는 과정에서 그 신적 존재가 자신의 원초적 일치를 희생하는 방식으로, 복음서들에서 진술된 구속적 행위들에서는 훨씬 더 심대하게 이런 희생 과정에 들어서야 하였다. 4장: “Christian Cosmology,” 33
초신성이 어마어마한 열 속에서 폭발하여 자신을 별 먼지 형태로 우주 공간의 광대한 영역으로 흩어지게 할 때, 예를 들면, 바로 이와 같은 우주론적 순간이 발생하였다. 이 폭발의 열 속에서 90여 가지 원소들이 형성되었다. 그 이후에야 비로소 행성 지구가 꼴을 갖출 수 있었고, 생명이 불러들여지고, 성찰하는 지성이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초신성 사건은 일종의 희생의 순간으로, 태양계와 지구의, 그리고 인간 존재 양식의 영적 차원을 포함하여 지구에 나타날 일체의 생명 형태의 가능성들을 정립해 준 우주론적 은총의 순간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 은총의 순간들이나 그리스도교적 은총의 순간들이 있을 수 있기 전에 이와 같은 우주론적 은총의 순간들이 필요하다. 모든 것이 우주의 과정을 결정하는 어떤 내적 지혜로 간주될 수 있을 무엇에 의하여 이끌려진다. 우주와 이 우주가 전개되는 창발적 과정이 모두 원초적 창발 때부터 한 물리적인 과정인 동시에 영적인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변혁의 순간들은 필연적으로 재앙의 측면을 갖는다. 참으로, 이 우주적 재형성의 순간들은 경이로운 폭력 한가운데서 발생한다. 이 세계가 급진적으로 새로운 존재 단계로 태어난다. 그리스도의 구속적 희생에 의한 만물의 우주론적 재구조화와 인간 존재 질서의 우주적 재구조화는 이런 순간들이 먼저 있은 다음에 발생하였다. 이것들은 서로 무관하지 않은 사건들이다.
대기에 자유 산소가 현존하게 되면서 새로 태어난 세포 생명이 위험에 처했을 때 지구의 역사에서 한 창조적 순간이 발생하였다. 산소를 생산한 이전 생명 형태들은 산소와 접촉한 상태에서 살 수 없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살아 있는 존재들은 적절한 양의 산소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지만, 자유 산소는 원래 모든 살아 있는 형태들에 매우 강력한 위협이 되었다. 이것은 바위들도 산화시켜 버리기 때문에 바위에조차도 위협이 되었다.
적절한 균형이 성취되고 안정화되기 위하여 한 은총의 순간, 곧 어떤 살아 있는 세포가 새로운 형태의 신진대사 과정을 촉진할 수 있도록 햇빛의 현존 안에서 산소를 이용할 방법을 발견해 낼 한 순간이 발생해야 하였다. 광합성이 호흡 작용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이 순간에 소멸의 위협 아래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살아 있는 것들의 세계가 번창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지구를 새롭게 꼴짓기에 이르렀다. 목장에 핀 국화들과 입내새의 노래, 바다를 헤엄쳐 다니는 돌고래들의 운동, 이 모든 것이 이 순간에 가능하게 되었다. 우리 자신이 음악과 시와 그림과 함께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한 특수한 방식으로 종교가 존립할 수 있게 되었다. 육화와 모든 신비들이 그리스도교의 계시와 결합된 형태로 출현하였다. 이 모든 것이 단순히 물리적-물질적 측면만이 아니라 정신적-영적 측면 역시 갖는 저 변혁의 순간들에 자신들의 가장 깊은 기원을 갖고 있다. 만일 우리가 바오로 성인과 요한 성인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사건들에 원초적 신성 차원 혹은 그리스도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그리스도-우주 방정식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 두 존재는 서로가 서로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각 존재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취하는 희생적 차원과 관련하여 특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 희생적 차원은 두 존재 모두에게 일종의 걸림돌이다. 우주의 계속되는 전개에서는 물론 우주의 매일의 생존에서 역시 우주가 수행하는 작용에는 각 실재가 다른 존재들을 위하여 희생하는 행위가 있다. 다른 존재들이 살 수 있도록 하는 이 죽음이 우주적 체험에서 관건을 이루는 무엇이다. 이러한 죽음은 십자가의 신비의 또 다른 한 국면이자, 창조적 살라바침의 신비이기도 하다.
인간이 무대에 등장한 이후, 우주의 운명, 특히 행성 지구의 운명과 관련하여 의식적인 인간의 결정에 의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결단이 이루어져야 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논의하는 기본 관심에 이르게 되는데, 자연적 세계의 창조적 과정들에, 그리고 그리스도교 세계의 구속적 과정들에 의식적으로 참여할 인간들의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나무들은 나무 권리를 갖고, 새들은 새 권리를 갖는다. 인간들은 인간-아닌 질서에 소재하는 이 권리들을 존중할 일차적인 의무를 갖는다. 그런데 이것은 자연적 세계에 대한 일체의 의무는 곧바로 우리 자신에 대한 의무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과 너무도 나르다. 자연적 세계에 대한 이런 태도 때문에 우리는 자연적 현상에 의하여 불러일으켜진 경이와 엄위, 경외와 두려움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지는 신적 계시에 대한 원초적 증거를 실현하고 있는 것들을 거의 남겨 놓지 않는 방식으로 이 행성을 약탈하고 있다. 이것은 지금 너무도 심각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역량있는 생물학자들에게 우리가 지금 우리의 세계를 살해하고 있다는 말을 듣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지금 발생하고 있는 종들의 소멸 현상은 약 6,500만 년 전에 중생대 시기가 붕괴한 이래 전례가 없을 만큼 심각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행성의 생물학적 체계들만 황폐화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해로운 방식으로 이 행성의 화학적 균형을 변화시키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지구를 독성물질로 오염시킴으로써 수억년 동안 심지어는 수십억년에 걸쳐서 성취해 온 균형을 불과 몇십 년 만에 교란시키고 있다. 미국에서만도 우리는 현재 매년 거의 대부분이 자연에 알려지지 않은, 그리고 자연이 소화해 낼 수 없는 산업 화학물질들을 2억톤씩 발생시키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으로 이러한 상황에 거의 책임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다. 우리는 영적 목적들에 당당하게 헌신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계의 운명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부적절해 보이는 듯싶다. 우리는 지금 자연적 세계를 통하여 울려나는 신적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같아 보이지 않는다. 자연적 현상에서 계시된 신적 존재의 광채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는 신적 존재의 이러한 현시들을 잃어 버리는 것이 가져올 결과들을 깨닫지 못하는 것같다. 우리의 신학자들은 하느님이 “창조물들 안에서 자신을 창조한다”는 스코투스 에리우게나의 진술이나 “지구를 통하여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테이야르 드 샤르댕의 진술에 별로 감동을 받는 것같아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신적 존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자연적 현상에 대한 우리의 체험에 깊이 의존해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같다. 우리는 그리스도-우주 방정식과 그리스도-지구 방정식에 대한 인식을 뚜렷하게 보여 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성찬을 거행하면서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한다고 성찬 집전자가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마다 이 방정식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영적” 지혜에 강력하게 집착하면서, 우주 자체에서 계시된 그대로의 저 신적 지혜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속적으로 소외시키는 경향이 있다. 먼저 지적한 것처럼, 우리가 직면한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현재 신적 지혜의 이 이중의 현시를 제대로 대할 줄 모르는 듯이 보인다. 우리가 일부를 이루고 있는 자연적 체계들로부터 인간적인 것들을 고립시키고 있다. 인간들이 이루어 온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지적 체제들에서, 정부와 교회, 대학과 기업체들에서 우리는 이와 동일한 어려움을 목격할 수 있다. 이 모든 영역에서 우리는 인간-아닌 존재로부터 인간들을 갈라서 이들 사이의 철저한 비연속성을 행성 지구에 체질화시키고 있고, 그 결과 인간에 의한 인간-아닌 존재들의 착취를 낳고 있다. 9장: “The Wisdom of the Cross,” 89-92
차이를 발생시키지 않은undifferentiated 광선으로부터 세 기본 성향들, 곧 차이화differntiation와 내적 자율성inner spontaneity과 서로간의 종합적 결속comprehensive bonding을 지향하는 성향과 함께 물질의 차이를 발생시킨 형태들로 움직여 간, 거대한 에너지들의 한 원초적 섬광. 나는 우주를 이렇게 본다. 최초의 원자 형태들로서 꼴을 갖춘 것은 가장 단순한 원소들인 수소와 헬륨이었다. 이것들은 맨 처음 시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주요 꼴을, 운하의 형태로, 제공한 첫 별들을 구성하였다.
이 원초적 섬광은 묘사를 허용하지 않는 한 찬란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우리 자신과 우리가 주변에서 보고 있는 세계가, 창조된 세계의 저 섬광에 함축된 그것을 설명하는 형태들이라는 것을 성찰할 때면, 우리는 단지 경이로움에 사로잡힐 뿐이다. 이 시작과 우리의 현재 상황 사이의 저 140억년에 걸친 전 이야기가 우리 시대의 최고의 서사시이자, 이전 시기에 상상할 수 있었던 일체의 것을 완전히 뛰어넘는 한 장대한 서사시이다.
우주의 이 일차적인 출현과 현재에 이르기까지 오랜 동안 지속되어 온 그 변모의 여정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처럼, 저 신성한 원천의 새로운 계시 체험을 구성한다. 모든 것은 맨 처음에 이 신성한 원천에게서 왔고, 특히 신적 존재가 모든 것을 일치에 이르도록 품는 저 종합적 포용의 힘과 장대함이야말로 그 원천에게서 비롯하였다. 이 시점에서 계시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주 적절한 일이다. 비록 원래 “베일을 벗기다”를 의미하는 이 용어가 여기서는 일정하게 성서 주석에서 표현된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의미로 쓰이기는 하였지만 말이다.
우리는 지금 맨 처음부터 작용한, 우주의 차이화하는differentiating 힘들과 품어들이는containing 힘들에 대해서, 그리고 이것들의 관계에 대해서 성찰할 수 있다. 이 두 힘들은 일정한 균형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차이화하는 힘들이 품어들이는 힘들을 압도해 버렸으면, 우주는 처음 순간에 폭발하여 아무 것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기 대문이다. 반면에 만일 품어들이는 힘들이 차이화하는 힘들을 압도해 버렸다면, 우주는 붕괴하고, 역시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두 힘이 완전한 평형에 이르렀다면, 우주는 고착되고, 그러면 이번에도 역시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주가 창발할 유일한 가능성은 한 창조적 비평형a creative disequilibium이 정립되어서, 전개 과정이 미래에까지 지속적으로 발생할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실제로 우리의 우주 사례에서 바로 이런 일이 나타났다. 진화 과정에서 창조적 비평형이, 창조된 모든 실재를 한 단일한 결속 내지 한 단일한 품으로 끌어안는, 공간의 곡률 형태로 표현되었다. 모든 친밀한 관계들이 여기서 시작된다. 모든 물리적 존재가 다른 모든 물리적 존재를 끌어당기고 또 그 존재들에게 끌리는 중력적 끌림의 기원 자리가 바로 여기이다.
나는 우주의 이 결속시키는 힘을 “위대한 연민의 곡선”이라고 부른다. 이 곡선은 우주의 다른 모든 존재 양식처럼 물리적-물질적 측면과 함께 정신적-영적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공간 곡률이 우리 시대에 이르러 우주에 대한 지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구석기 시대 말기에 우주를 존재하게 하고 지구가 이토록 풍부한 생명을 낳도록 한, 저 양육하는 원리로서 ’어머니 여신‘으로 표현되었더랬다. 비옥함을 낳는 존재로 표상된 이 신은 우리 시대에 단순 곡선 이미지로 존재하는데, 우주는 이를 통하여 모든 친밀함들을 유지하면서 서로 결속되어 있고, 이런 친밀함들에서 그토록 풍부하게 생명이 창발한다.
우주의 이 원초적 순간의 또 다른 한 주목할 측면은 창조계 전체의 미래가 현재 나타나고 있는 세 가지 주도적인 성향들-차이화, 주체성subjectivity, 관계성relationality-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 세 성향들이 순차 없이 나타나지만, 먼저 차이화 성향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주에 있는 각 존재는 유일무이하다. 각 존재는 다른 존재는 줄 수 없는 어떤 것을 우주에 가져다준다. 그러므로 각 실재는 고유한 가치를 갖는다. 나뭇잎 하나 하나는 서로 다르다. 각 눈꽃송이가 다르고, 각 꽃이 다르고, 여명은 여명마다 다르고, 석양은 석양마다 다르다. 인간 차원에서 보자면, 각 개별인은 거의 다른 종인 듯싶을 만큼 서로 다르다.
둘째 성향, 곧 주체성은 내적 명료화inner articulation의 창발이다. 각 존재는 그 자체의 내면적 구조와 지성과 내적 자율성과 목소리를 갖고 있다. 개별 존재 각각은 자신의 내적 행동 원리를 갖고 있고, 우주에 있는 다른 모든 존재와 관계를 맺을 능력을 갖는다. 각 존재는 일정한 정도로, 그렇지만 약한 형태로, 의식과 인격의 특질들을 공유하고 있다. 단순히 사용될 대상이기만 한 것은 없다. 각 존재는 존중을 요청하는 그 자체의 존엄을 갖는다. 각 존재는 신적 존재의 현존을 담지하고 있다.
우주의 셋째 성향은 관계성 혹은 친교의 그것이다. 이것은 각 존재가 우주에 있는 다른 모든 존재와 결속을 이루려는 성향이다. 어떤 것도 다른 일체의 것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인간들과, 그리고 지구의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과 친교를 이룰 때, 가장 충만하게 우리 자신으로 존재하게 된다. ...
여기서 우리는 자신이 우주의 구조와 그것의 작용을 성찰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분명하게 이 우주가 우리가 오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말하는 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의 진술과 같은 말들을 상기하게 된다. 이 결론에는, 일부 종교 전통들에서 조장된 예정설에 빠지지 않으면서, 인간 정신 안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향하는 우주의 어떤 성향이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관념들이 곧바로 그리스도 실재의 우주적 차원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것들은 우리가 일정한 방식으로 우주를 인간의 우주적 차원과 연관짓지 않고는 우주 자체를 성찰할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다.
우리는 우주를 이것의 다양한 표현 양식들을 통하여 알게 된다. 우주는 그 자체를 아름다움과 생명과 의식을 통하여 표현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는 아름다움을 생산하고 생명을 생산하며 의식을 생산하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능력들과 함께 신성한 실재, 신적 실재에 직면하여 우리는 단지 놀랄 수밖에 없다. 저 원초적인 타오르는 불꽃과 현재까지 발생해 온 장구한 변혁들의 연속은 모두 그 실재에서 발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21세기의 교회의 역할은 우주와 관련하여 보다 더 직접적으로 우주 자체를 신적 존재의 원초적 계시로 진술하는 데 있다. 말을 통한 계시가 일차적 계시일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해졌다고 본다. 언어를 통하여 발생하는 일체의 소통은 언어의 왜곡들과 시대의 특정 사회적 형태들, 그리고 특정 역사 시기에 발생하는 사건들의 복합적 틀들에 근거하여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자연적 세계의 계시는 직접적으로 그리고 매개 없이 창조된-존재creatureliness라는 의식과 함께 경외와 신비 의식을 일깨워 준다. 이것은 또한 예배를 향한 성향을 불러일으켜 주기도 한다.
최근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영혼과 내적 삶, 영적 수련, 성사 참여, 자비 활동들, 빈곤한 이들을 돌봄과 같은 일들에 관심을 집중해 왔다. 이 모든 활동들은 초-지상적 영역에서 구원을 찾는 데로 귀결된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장대함을 띤 저 자연적 세계의 상실을 불러들였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이 영혼의 영적 구원에 핵심적인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이들에게 이것은 단지 세속 자연주의자들의, 혹은 기계론적 과학자들의 영역에 속한 것일 따름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인간과 인간-아닌 존재 사이의 비연속성이 그리스도교 안에서 심각하게 정착되어 있었다.
이런 성향에 대응하기 위하여 우주에 대한 보다 더 합당한 이해를 갖출 필요가 있다. 우주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우주의 통치 성향들은 어떤지, 우주가 현재 표현 형태들을 취하기까지 진행되어 온 변혁들의 연속 과정은 어떤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태양계와 지구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고, 행성 지구에서 생명이 어떻게 발전하였는지, 그리고 우리 자신이 어떻게 출현하였고, 이 놀라운 과정에서 우리 인간의 역할은 어떤 것이어 왔는지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물리적 과정으로만이 아니라 영적인 과정의 다양한 측면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종합적이고 깊은 이해만이 인간의 웰빙이 달려 있는 행성 지구의 통합적 작용을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21세기 교회의 근본 과제이다. 6장: “Role of the Church in the 21st Century,” 53-5, 57-8
Thomas Berry, CP, The Christian Future and the Fate of Earth, Eds. Mary Evelyn Tucker/ John Grim, Orbis Books, 2009
성찰 포인트
계시로서 우주
이야기의 역할
객체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주체들의 친교로서 우주
인간 이야기와 지구 이야기와 우주 이야기의 관계
경제, 정치, 교육, 종교
기업과 노동자, 정부 등 정치 기구와 시민, 학교와 교사-학생-학부모, 교회-절과 신앙인
누구의 경제, 정치, 교육, 종교인가?
누구의 범위-사람, 지구, 우주, 하느님
Ecology와 집과 살림, 그리고 관계
춤과 살림-춤의 바닥
춤아, 너 누구를 딛고 있고, 너, 누구의 바닥이냐?
춤아, 너 누구의 것이고 싶으냐?
- Jong Ryul Hwang 레오
하느님, 당신이 생태이시고,
예수님, 당신이 우리의 생태이십니다. 돌과 물과 여러분이 그분의 살림 안에서 저의 생태이십니다. 나눔자리 : http://cafe.daum.net/dmspiri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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