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지난주는 사마리아 여인의
영적 갈증을 채워주시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치 동네 청년이
처녀에게 치근대고 수작을 걸듯
우물가의 여인에게 원치도 않는데 다가가십니다.
여인은 갈증을 푸는데 이렇게 수동태였습니다.
오늘은 태생소경의 눈을 뜨게 하심으로
영적으로도 눈을 뜨게 하시는 얘깁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생소경은 길가에 앉아있다 느닷없이 주님과 만납니다.
그런데 태생소경은 사마리아 여인보다 더 수동태입니다.
찾아가 만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가오심으로 만난 것은 둘 다 같지만
사마리아 여인은 영적인 물을 청하기라도 했지만
오늘 복음의 태생소경은
보게 해달라고 청하지도 않았는데,
아니 청하기도 전에,
주님께서 눈을 뜨게 해주십니다.
얼마나 눈물 나도록 고맙습니까?
어련히 알아서 우리의 아픔을 헤아리시는 주님의 사랑이.
우리가 말하거나 보채지 않아도, 아니 보채지 않도록
미리 우리의 모든 필요와 아픔을 아시고
보살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오늘 얘기에는
이것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다가오시고,
주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다 해주실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의 사정을
오늘 얘기는 우리에게 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소경은 태생소경입니다.
다른 공관복음의 보다가 못 보게 된 소경과 달리
오늘 복음의 소경은 보는 것이 무엇인지
아예 모르는 태생소경입니다.
그러니 보다가 못 보게 된 사람처럼
못 보는 것이 답답하지도 않고
보게 되면 무엇이 왜 좋은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복음의 다른 소경들처럼
눈을 뜨게 해달라고 청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속 편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얼마나 한심합니까?
그런데 영적으로 보면 우리가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그처럼 영적인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고,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은 그래도 갈증이라도 있는데
우리는 태생소경처럼 영적인 갈증이 없습니다.
영적인 세계를 못 봐도 하나도 답답하지 않고
이 세상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는 것만으로
오늘 바리사이처럼 잘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바리사이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는 오늘 바리사이처럼
잘 본다고 깝죽거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은 잘 보면서
볼 것은 못 보고 있음을 겸허히 인정해야 합니다.
잘 본다고 함으로써 보게 해주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거부하지 말고
오늘 태생소경처럼
주님의 손길에 차라리 그냥 맡겨야 합니다.
주님 하심에 수동태로 말입니다.
바리사이들처럼 다가오시는 주님을 거부하여
스스로 영적 어둠 속으로 숨어들고 갇혀있지 말고
주님의 영적 빛 가운데서
빛도 쬐고
빛으로 보도록 해야 합니다.
빛을 피하면 어둠인 것.
햇빛이 싫어 양산을 쓰고,
햇빛을 피해 그늘로 숨듯
어찌 빛이신 주님을 거부하고 피하여
어둠에 천연덕스럽습니까?
어둠에 철퍼덕,
아니 퍼질러 앉아 있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 김찬선(레오니르도)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