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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1-04-04 조회수840 추천수15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1년 4월 4일 사순 제4주간 월요일
 



Jesus said to him, 
"You may go; your son will live."
The man believed 
what Jesus said to him and left. 
(Jn.4.50)
 
 
제1독서 이사65,17-21
복음 요한4,43-54

명예, 지위, 돈,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대단한 성공을 거둔 사람이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대학생과 기자들은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지요. 그는 평소에 강의나 인터뷰를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등장하자마자 칠판에 무언가를 적었습니다.

“1,000억!”

그리고 말을 시작했습니다.

“전 재산이 아마 천 억은 훨씬 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으므로 고개를 끄덕였지요.

“여러분, 이런 제가 부럽습니까?”

“네!”

여기저기서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이 대답을 들은 그는 웃으며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지금부터 이런 성공을 거두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1,000억 중에 첫 번째 0은 바로 명예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0은 지위입니다. 세 번째 0은 돈입니다. 이것들은 인생에서 필요한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럼 앞에 있는 1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1은 건강과 가족입니다. 여러분 만일 1을 지우면 1,000억이 어떻게 되나요? 바로 0원이 되어버립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에서 명예, 지위, 돈도 중요하지만 아무리 그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건강과 가족이 없다면 바로 실패한 인생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제야 진정한 성공의 의미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답니다.

지금 내가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려 보세요. 나를 있게끔 한 것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부차적인 것을 더욱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그 부차적인 것을 위해서 중요한 것을 포기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오늘 복음에서 보면 한 왕실 관리가 예수님께 자기 아들을 살려 달라고 청합니다. 분명히 예수님 보다 세속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라면서 아들을 고쳐 주는 것을 미루려고 하지요. 어떻게 보면 자신의 명예가 손상되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께 명예와 지위를 내세우기보다는 간절히 매달릴 뿐입니다. 바로 자신의 명예나 지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것을 위해 부차적인 것을 포기하는 그의 모습이 예수님의 기적을 이끌었던 것입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순간에 불과한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이 아닌 자신을 있게끔 하는 중요한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항상 자신을 고려하는 사람은 곧 망할 것이다.(메리 페티본 풀)



 

 

기원전 5세기 때의 인물로, 위대한 역사가이자 수학자인 헤로도토스는 최초로 평균의 개념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당시만 해도 그것은 엄청난 발견이었으며, 그는 이에 완전히 심취되어 있었지요.

어느 날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야외로 소풍을 나갔다가 작은 강과 마주치게 됩니다. 아내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 강 깊이를 알 수 없었고, 따라서 깊은 곳에 아이들이 빠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자 헤로도토스가 말합니다.

“걱정 말고 기다리시오. 내가 강의 평균 깊이와 아이들의 평균 키를 잴 테니, 5분이면 충분할 거요.”

줄자를 꺼내 든 헤로도토스는 아이들 키의 평균치를 낸 다음, 강으로 달려가 몇 군데의 지점을 돌면서 강의 깊이의 평균치를 계산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지요.

“걱정할 것 없소. 아이들의 평균 키가 강의 평균 깊이보다 크니 익사할 염려가 전혀 없소. 얘들아, 어서 강을 건너자!”

그러나 강의 어떤 지점은 얕은 반면에 어떤 지점은 매우 깊겠지요. 그리고 어떤 아이는 키가 컸지만 어떤 아이는 작았습니다. 따라서 ‘평균치’라는 것은 실제 상황에서는 맞지 않는 법입니다. 오직 수학적인 계산일뿐이지만 헤로도토스는 장담합니다. 수학적으로 전혀 오차가 없다고 말이지요. 그러나 아버지의 말을 듣고 강에 들어간 한 아이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립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헤로도토스는 아이를 구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자신이 계산했던 모래밭으로 달려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검산하고 있었다고 하네요.

헤로도토스는 자신의 학문을 굳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굳게 믿었던 학문이 자신의 사랑하는 아이를 죽음의 위험으로 이끌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역시 엉뚱한 것에 믿음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분명하다고 오류가 전혀 없다고 그래서 굳게 믿어야 한다고……. 그러나 이 세상의 물질적인 모든 것들 가운데에서 참된 진리란 과연 존재할까요?

참된 진리란, 그래서 우리가 굳게 믿어야 할 대상은 하느님 한 분 뿐이십니다. 그분께 대한 굳은 믿음만 있다면 인간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가능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한 왕실 관리가 예수님께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자기 집으로 내려가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왕실 관리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매달리며 말합니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이에 예수님께서는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이 왕실관리는 이 말씀을 믿고 떠나갑니다.

사실 집에 함께 가주지 않는 예수님을 보면서 얼마나 야속했을까요? 아파하는 아들을 고쳐줄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 한분뿐인데 막연하게 ‘살아날 것’이라는 말 한마디만 하니, 과연 믿음이 갔을까요? 따라서 왕실관리라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끌고 집으로 데려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우리들의 세속적인 예상과 달리 굳게 믿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자신의 아들을 살리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과연 어떠한지요?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도 굳게 믿을 수 있는 깊은 신앙을 간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 세상의 관점과 판단으로 보이는 것만을 믿으려고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말씀 한 마디에도 굳은 믿음을 보여주는 왕실관리의 모습을 닮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마음을 가지고 성경을 읽읍시다.
 
 

Venez Paste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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