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않는다.” - 4.6,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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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11-04-06 | 조회수538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1.4.6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이사49,8-15 요한5,17-30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않는다.”
말씀 묵상 중 떠오른 13년 전 써놓은 ‘나무로 살고 싶다’는 시입니다. 시 감상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나, 나 씨였다면 이름은 무조건 ‘무(無)’였을 것이다.
성명은 ‘나무(無)’ 나 없어 무아(無我)이니 얼마나 좋은 이름이냐.
나무처럼 늙어 가면 얼마나 좋으랴
넉넉하고 편안하게 나무 향기처럼 싱그러운 마음 향기라면
나무 나이테처럼 영혼의 나이테 신비 그윽한 무늬와 색깔이라면 얼마나 좋으랴 늘 봐도 늘 좋은 나무야 나 나무(無) 되어 살고 싶구나.
내 성명은 나무(無)다”(1999.2.28)
바로 예수님의, 이사야의 또 다른 이름은 ‘나’가 없는 ‘나무(無)’입니다. 무아(無我)의 이분들을 통해 환히 들어나는 하느님입니다. 무아의 텅 빈 자리에 가득한 하느님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라 고백한 사도 바오로의 이름 역시 나무입니다. 무한한 가슴은 채움으로 채워지는 게 아니라 역설적으로 비워갈수록 사랑으로 채워지는 ‘텅 빈 충만’입니다. 바로 사랑할수록 비워져 ‘텅 빈 충만’이요 바로 이를 일컬어 하느님의 현존이라 합니다. '나(ego)'로 가득하기에, 나에 가려 하느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참 하느님 보고, 느끼기 힘든 세상입니다. 하느님으로 가득한 ‘텅 빈 충만’의 예수님의 다음 말씀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껏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주신다.”
예수님의 경지는 우리 모두에게 부여된 숙제입니다. 예수님은 보라고 있는 게 아니라 닮으라고, 또 하나의 예수가 되라고 주어진 숙제입니다. 사랑의 섬김으로 부단히 비울 때 하느님으로 가득한 또 하나의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어제 읽은 ‘일(事)’에 대한 뜻풀이가 새로웠습니다. “일을 뜻하는 ‘사(事)’ 속에는 다른 뜻이 숨겨져 있다. 곧 ‘섬기다’라는 뜻이다.” 바로 섬기는 행위 모두가 일이라는 것입니다. 소임이나 직업의 좁은 의미의 일보다 훨씬 넓은 뜻을 지니는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살아있음이 섬김의 행위가 될 때 살아있음 자체가 모두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침묵 중에 끊임없이 섬김으로 일하시며 예수님 역시 하느님을 닮아 평생 섬기는 일에 전념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섬기는 일을 멈추면 우리 생명은 끝장입니다. 매일 미사를 통해 우리를 말씀과 성체로 섬기러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진정 하느님의 사람들처럼 나무 같은 삶이라면 그가 하는 섬김의 일은 모두 하느님의 일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섬기는 일에 동참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으로 섬기는 일에 충실함으로 나를 비워 무가, 나무가 되어 갈수록 더욱 우리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이래야 하느님과 이신전심의 일치를 이루어 삽니다. 누구보다 이심전심, 하느님 마음에 공감했던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바로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인 사순시기 우리 모두를 향한 복음입니다.
“너희는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너희를 해치지 못하리니,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너희를 이끄시며, 샘터로 너희를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음은 이와 같은 하느님의 보호와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말씀대로 주님의 샘터인 미사로 인도해 주신 주님이십니다. 이를 깨달아 기뻐하라 외치는 하느님의 사람 이사야입니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신다.”
바로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위로하시고 가엾이 여기시는 주님께서 당신의 생명의 말씀과 사랑의 성체로 우리를 치유하시고 배불리십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절정은 끝부분입니다. 이사야를 통해 들어나는 우리 모두를 향한 하느님의 열정적 사랑입니다.
“너희는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말하였지. 여인이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않는다.”
바로 이게 우리 하나하나를 향한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진정 나무되어 살 때 전달되어 오는 하느님의 마음이요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않는다.’ 이런 하느님 체험이, 확신이 내적 힘의 원천입니다. 하여 오늘 강론 제목은 ‘나 나무로 살고 싶다.’에서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않는다.’로 바꿨습니다. 하느님과 단절된 내가 모두가 된, '내(ego) 중심적 삶'은 살아있다 하나 실상 죽어있는 삶입니다. 이런 죽은 이들을 향한 다음 주님의 우레 같은 말씀입니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매일의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나(ego)'로부터 벗어나 주님 안에서 ‘나무(無)’로 살아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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