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순 제4주간 목요일> 성경 - 송영진 모세 신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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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노병규 | 작성일2011-04-07 | 조회수590 | 추천수9 | 반대(0) 신고 |
<사순 제4주간 목요일>(2011. 4. 7. 목)(요한 5,31-47)
<성경> 4월 7일의 복음 말씀의 내용을 요약하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하느님께서 증언하시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 증명하고, 성경 말씀이 증언하고, 세례자 요한이 증언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을 수 있고,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을 상대로 하신 말씀이고,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성경 말씀이 유일합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직접 들었을 것이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직접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신약성경의 기록을 통해서만 알 뿐입니다. 또 제자들 중에는 하느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들은 그 일도 신약성경의 기록을 통해서 알 뿐입니다. 어떻든 오늘날의 우리들 입장에서는 성경만 잘 읽어도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을 수 있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 복음 말씀의 내용입니다. 자, 그런데 똑같은 성경을 읽어도 어떤 사람은 믿고, 어떤 사람은 안 믿는 이유가 무엇일까? 또 믿는다고 해도 왜 이렇게 종파가 많이 갈라져 있을까? 또 성경이라는 책 자체도 왜 이렇게 번역이 다른 경우가 많고, 해석이 다른 경우가 많을까? 똑같은 성경인데, 해석이 달라지고 결론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만 잘 읽으면 예수님을 믿게 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은 백 퍼센트는 아닙니다. 성경만 읽다가 이단자가 되기도 하고, 아예 믿음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녹음기라는 것도 없었고, 당시 상황을 보면 그 자리에서 받아 적은 것도 아닙니다. 제자들은 순전히 기억에 의지해서,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예수님의 말씀을 종이에 적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각 복음서마다 조금씩 차이가 생겼습니다. 기억력의 차이겠지요. 그러나 핵심 내용은 다르지 않았고, 해석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좀 더 세월이 흐르고 사도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다음에,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사람들이 하나도 남지 않았을 때, 이제 해석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건 이런 뜻으로 하신 말씀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아니다, 그건 저런 뜻으로 하신 말씀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나서 갈등하고 대립하고, 그러다가 서로 이단이라고 싸우고... 그게 이미 초창기 때부터 있었던 일입니다. 교회의 이천 년 역사에서 이단자들과 가장 많이 싸운 시기는 바로 초창기입니다. 그래서 성경 해석을 할 때에는 어떤 분명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기준은 바로 '믿음'입니다. 하느님을 창조주로 믿는 사람이 창세기를 읽는 것과 그런 믿음 없이 진화론만 믿는 사람이 창세기를 읽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사람이 신약성경을 읽는 것과 그런 믿음 없이 읽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마리아를 동정녀로 믿는 사람이 읽을 때와 안 믿는 사람이 읽을 때 해석은 극과 극으로 달라집니다. 성체성사 교리를 믿는 사람이 최후의 만찬 부분을 읽을 때의 해석과 믿지 않는 사람이(믿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읽을 때의 해석이 완전히 다릅니다. 믿음으로, 또는 믿으려는 마음으로 읽어야 예수님 말씀이 살아 있게 됩니다. 그런데 순전히 비판하고 분석하고 시비를 걸기 위해서 읽는다면, 성경은 참으로 허술하고, 시비 걸기 딱 좋은 책입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성경을 만들 때 다른 해석이 나오지 않도록 제대로 만들었어야 하지 않는가? 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완벽하게 만들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인간들이란 원래 좀 복잡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애인에게 '사랑해!' 라고 말합니다. 보통의 경우에는 그 말은 사랑한다는 고백입니다. 그 말을 한 사람은 정말로 사랑한다는 뜻으로 그 말을 했는데, 듣는 쪽에서, 혹시 바람피우는 것을 감추려고 이 말을 하나? 라고 의심한다면, 또는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습관적으로 하는 말은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면, 아니면 나를 의심해서 한 번 떠보려고 하는 말일까? 라고 생각한다면, '사랑해!' 라는 그 말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걸 해석하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 해석이 학자마다 종파마다 달라지는 것은 성경 탓이 아닙니다. 그건 인간들 탓입니다. 학자마다 믿음이 다르니 성경 해석이 달라지고, 종파마다 교리가 다르니 성경 해석이 달라집니다. 예수님도 한 분이고, 예수님의 말씀도 하나인데,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믿음과 마음과 생각이 갈라져 있어서 마치 말씀이 여러 가지인 것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사랑해!' 라는 말이 원래의 뜻 그대로 전달됩니다. 예수님을 올바르게 믿는 사람에게만 예수님의 말씀이 온전하게 살아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전혀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는 사람이 성경만 읽고 믿음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긴 있습니다. 그건 그 사람의 마음이 백지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사심 없이, 편견이나 선입관 없이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읽고 싶은 대로 읽고, 해석하고 싶은 대로 해석합니다. 그러면서 진짜 예수님은 잃어버립니다. 진짜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만나려고 하기 때문에 못 만납니다. 안 믿으려고 하니까 못 믿는 것입니다. 4월 7일의 복음 말씀에 ‘증언’이라는 말이 열두 번이나 나옵니다. 그런데 아무리 진실한 증언이고 증거라고 해도 위증이라고 의심하기 시작하면 믿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 송영진 모세 신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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