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요한11,1-45)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사랑하는 나자로를 살리시는 얘깁니다.
결론적으로 보면 주님은 나자로와 생명을 맞바꾸십니다.
나자로를 살리는 대신 당신은 죽게 되시는 것입니다.
나자로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자
유대교 지도자들은 눈엣가시 같은 주님을 죽이기로 작정을 합니다.
아무리 사랑이 그런 것이라지만 누구를 위해 누가 죽는다는 것,
이것이 쉽게 이해되는 것입니까?
나를 위해 누가 대신 죽는다면,
대신 죽지는 않아도 나를 살리다가 누가 죽는다면
미안해서 내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인단 말인가?
그러니 그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그 죽음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고,
그 사랑에 대한 사랑으로 다시 죽을 수 있는,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제는 어떤 일 때문에 수원을 다녀왔습니다.
전철을 타고 가는데 늘 있는 풍경과 또 마주쳤습니다.
노인이 타셨는데 젊은이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앉은 줄에 저 말고 다 젊은이였는데,
어떤 젊은이들은 휴대전화로 무언가를 보고 있고,
어떤 젊은이들은 게임을 하고 있고,
어떤 젊은이들은 음악을 들으면서 연신 음료를 먹고 있고,
연인들은 손잡고 서로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젊은이 중 사랑할 줄 아는 사람 하나도 없다는 것이 슬펐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제가 일어나 자리를 내어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네가 자리를 앉으시는데
미안한 표시는 없고 고맙다는 소리도 없었습니다.
그냥 쑥 않고는 그만입니다.
저를 쳐다보지도 않아서 어떤 눈인사도 할 수 없었습니다.
미안해 할까봐 옆으로 비켜서 있던 제가
정말로 고맙지도 미안하지도 않은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그분 앞으로 가서 섰습니다.
미사 가방을 들고 있었기에 혹시 미안한 마음에 그 가방이라도
당신 무릎에 놓으라고 하는지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 씀이 하나도 없었고 저를 의식하지도 않았습니다.
젊은이들은 그럴지라도 어른들은 사랑을 알 거라고,
그래서 미안해하고 고마워할 거라고 저는 생각을 했는데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그 노인네를 보고 더 슬펐습니다.
그리고 더 생각해보니 그들이 너무도 불쌍했습니다.
사랑을 사랑으로 받을 줄 모르기에 사랑할 줄도 모르는 그들.
사랑을 받고도 그것을 사랑으로 느끼지 못하니
사랑을 받고도 미안하지도 않고 감사할 줄도 모르는 그들.
이것보다 더 큰 장애나 불능이 어디 있습니까?
일생 그런 식으로 사랑을 못 느끼며 산 인생,
일생 그 사랑의 미안함과 감사함을 모르고 산 인생,
그래서 받은 사랑을 나누며 살지 못하는 인생은 얼마나 딱합니까?
이런 딱한 인생의 우리에게 주님께서 사랑의 빛을 주셨습니다.
나자로를 살리며 돌아가시는 주님의 사랑은
자신을 태워야지만 빛을 내는 촛불처럼
사랑 없는 우리의 어둠을 밝히시고
우리를 사랑 장애로부터 구출하십니다.
주님은 오늘 외치십니다.
“나자로야, 이리 나와라.”
사람들에게 이르십니다.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여라.”
오늘 우리에게도 사랑 없는 죽음으로부터 나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사랑의 장애에서부터 해방되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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