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분풀이, 용서
(요한8,1-11)
신문에 나온 얘기들입니다.
“실직한 아들이 왜 머리에 물을 들였냐는 아버지의 말에 화가 나서
아버지 머리를 목검으로 때려 숨지게 하고 시신을 불태웠다.”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술집 앞을 지나던 30대 남자를
그냥 때리고 흉기로 목을 찔렀다.”
“2010년 대검찰청 범죄 분석에 따르면 전체 살인 중
2005년 32%에 불과하던 우발적 살인이 2010년 48%로 늘어났고,
전체 폭력 중 우발적 폭행이 41%, 우발적 치상은 76%였다.”
세상이 참 狂暴해져간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고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 아무하고나 싸우려 달려듭니다.
분노의 기운이 하늘을 찌를 정도로 안에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수평 폭력이란 이론이 있습니다.
분노가 생기고, 그것이 해소되지 않은 채 쌓이면 폭력으로 바뀌는데
그 분노가 안으로 향하면 자살로 나타나고
밖으로 향하면 폭행이나 살인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밖으로 향하는 폭력이
자신을 억압하는 근원을 향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보다 약하거나 비슷한 사람에게 표출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이론에 너무도 동의합니다.
우리말에 분풀이라는 것이 있는데
남산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성내는 것이나,
사람에게 혼나고 돌을 걷어차거나 동물을 학대하는 것이나,
시어머니한테 야단맞고 아이들한테 화를 내거나,
회사에서 꾸지람 듣고 술 먹고 들어와서는
아내한테 폭력을 행사하는 것 등이 다 이런 폭력입니다.
그런데 이 분노가 집단적으로 표출될 수도 있습니다.
사회 전체적으로 분노가 쌓이면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집단 히스테리의 일종인 셈이지요.
자신들의 고통과 불행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사회적 약자에게 함께 퍼붓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 오늘 복음의 간음한 여인이나 예수님은
이런 집단적 히스테리의 희생자들이 만난 것입니다.
한 여인이 간음했다고 많은 사람이 죽이려고
그렇게 집단적으로 덤벼들 필요와 이유가 뭐 있습니까?
예수님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그렇게 열렬히 환호하던 사람들이 졸지에 죽이라고 외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로마의 압제 하에 있던 이스라엘을 구원하리라 믿었던 예수님이
그럴 의지가 없거나 힘이 없다고 판단되자
집단적인 환호가 집단적인 분노로 바뀐 것이지요.
분노의 근원에 해당하는 사회, 정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에게 향하는 분노를 예수님께 향하게 만든 것이고요.
아무튼 집단적 분노의 희생자들이 만났습니다.
여인의 죄는 분노보다 작아도 너무 작은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작은 죄를 죽음으로 묶으려고 하였는데
예수님은 그 죄를 죽음으로부터 풀어줍니다.
죽어야 할 죄가 아니라 용서받아야 할 죄입니다.
작은 죄로도 죽이려드는 분노가 아니라
큰 죄로도 사람을 죽게 할 수 없다는
주님의 그 용서가 죄를 죽음에서 풀어준 것입니다.
죽이려고 몰려들었던 이들은
죄 없는 사람부터 돌을 던지라는 말에 물러날 것이 아니라
끝까지 예수님께서 어떻게 죄인을 용서하셨는지 봐야 했습니다.
그래서 분노는 분풀이를 통해서 풀리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통해서 풀리는 체험을 했어야 했습니다.
분노는 자신을 불행케 한 사람들에 대한 깊은 차원의 용서,
그들에게 무력했던 자신에 대한 용서를 통해서만 풀리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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