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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5주일 월요일 - 내 영혼의 부활![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작성자박명옥 쪽지 캡슐 작성일2011-04-11 조회수570 추천수7 반대(0) 신고
                                                        
 
 
 
 
 
 

        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찬미예수님

인간관계 가운데서 아주 불편한 관계가 소위 고부간에 관계라고 그럽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와의 관계~~

그 관계가 또 좋은 사람도 많겠지마는 이상하게 사제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 때문에 면담을 하러오는 사람이 많다보니까~~

글쎄~~ 신부 머릿속에는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별로 사이가 안 좋은 것 같다.’

하는 것이 박혀있습니다.

근데 사실은 좋죠?

대답이 역시 없는 것 보니까 맞군요!^^


아무튼 참 같은 여자끼린데~~

이론적으로 생각하면 며느리 어려운 것을 시어머니가 잘 알 것 같고~~

자기도 똑같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또 같은 여인이기 때문에 시어머니의 입장을 며느리가 잘 알 것 같은데도~~

보면 참 뭔가 불편하고~~

시어머니 만나서 시어머니 얘기 들어보면 시어머니대로 며느리한테 서운한 게 많고~~

며느리는 또 며느리대로 얘기 들어보면 시어머니가 그렇게 미워하고 그것 때문에 이혼 까지 가야되느니 말아야 되느니~~

하는 얘기를  참 많이 듣습니다.


같은 체험을 한 사람은 사실은 더 너그러워야합니다.

왜 이렇게 서두를 꺼내느냐?


죄인은 다른 죄인을 쉽게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 원인은 자기 죄 때문이 아닌가?

결국 죄인을 용서하는 건, 선한 사람들입니다.

특히 높은 선을 가진 분은 죄인의 죄를 묻지 않습니다.

과거를 들추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 성서의 예수님처럼

선 자체이신 분은 죄를 묻지 않는데

대부분 꼬치꼬치 죄를 파고들어가는 것은

방구 뀐 놈이 먼저 큰 소리 낸다고·~~

죄 많이 지은 놈이 항상 지보다 훨씬 죄가 작은 사람을 찍어 내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파헤치려고 합니다.


어떤 학자가 실험을 했습니다.

죄수들을 시험하는데 한 청년을 간통한 남자로 꾸며가지고 강력범들이 수감되어있는 감방 안에 처넣었습니다. 그러자 그 감방 안에 강력범들은 정말 신이 나서 마치 먹이가 하나 들어온 것처럼 별의별 방법으로 그 청년을 괴롭히고

너 같은 놈은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하다.’고 온갖 욕설과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살수가 없을 정도로 그 청년을 괴롭혔던 겁니다.


다시 말하면 그 강력범들의 마음 속안에는 이미 지옥이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그 청년을 똑같은 죄목으로 위장을 해서 죄 없이 억울하게 갇혀있는 감방에 넣어 보았더니 아무도 그 청년을 괴롭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누구도 그 청년의 죄를 따지거나 묻지 않았고 오히려 친절하게 도와주면서 위로를 했습니다.

그것은 거기 있는 사람들이 선하기 때문에 공격을 하지 않았던 겁니다.


군대를 갔다 오신 우리 형제분들은 비슷한 체험을 했을 겁니다.

군대생활을 할 때에도 대개 졸병들에게 심하게 기합 주거나 아주 못되게 구는 고참들은 대개 말썽꾸러기거나 아니면 사고자들이 대부분입니다.

문제가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문제를 참아주지를 못합니다.


이것은 가정과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죠.

아버지가 죄 중에 있으면 그 자식의 잘못을 용서를 못합니다.

죄인이 죄인을 더 찍어 누릅니다.

그래서 결국에 용서를 받지 못합니다.

방구 뀐 놈이 더 큰소리를 칩니다.


오늘 스스로 하느님 앞에 당당하다고 생각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이 두 종류의 인간들이

유대 법에 의하면 돌로 쳐 죽여야만 마땅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에 데려다놨습니다.


스스로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 두 종류의 인간들이

죄인 중에 죄인인 간음한 여인을 데려다 놨습니다.


 

간음은 유대인들의 삼대 범죄 중에 하나였죠.

삼대범죄가 뭡니까?

살인죄, 우상숭배, 그리고 간음죄.

유대 법에 의하면 이 삼대 범죄는 돌로 쳐 죽여야 됩니다.


율법은 사형을 단언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20장 10절에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는 반드시 죽일지어다.

신명기 22장 13절에 보면 약혼한 여자의 경우에 그 여자와 농락한 남자는 성문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둘 다 쳐 죽여라.


법적인 견해로 보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전적으로 옳았습니다.

사형을 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퇴양난에 빠집니다.

그 여인을 죽이라고 얘기한다면 이제까지 예수님이 얘기했던 사랑과 자비심이 많은 분이라고 하는 그 명성을 영구히 상실할 상황이 되었고~~

또 로마법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사람을 죽일 수 없었기 때문에 로마법과도 충돌이 됩니다.


<죽여서는 안 된다!>

만일 이 말이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면 바로 모세 율법을 깨뜨리는 간음을 조장하는 그런 사람으로~~

전통을 거부하는 사람으로 되기 때문에~~

그야말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들은 ‘

‘니놈이 아무리 영악해도 이 함정에서는 빠져나갈 수가 없을 것이다.’

하면서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끌어다 놓고

이것을 쳐 죽일까요? 용서할까요?’ 하고 묻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거기에 대해서 처음에는 아무대꾸도 하지 않고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땅위에 쓰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모리악 이라고 하는 프랑스 작가는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했느냐?

죄지은 여인이 부끄러워할까봐 당황하지 않게 눈을 마주치지 않고 죄지은 여인을 진정시키려고 일부러 그 여인의 시선으로부터 땅에다 뭘 쓰고 있었던 것이다.


또 어떤 영성신학자들은 시간을 주어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니들이 얼마나 잔인한가!’

를 스스로 깨닫게 하시려고 시간을 주고 있었다.


또 어떤 학자들은 ‘성급한 결단을 내리시지 않으려고 성부로부터 분별력을 청하는 시간을 벌고 계셨던 것이 아닌가!’

하느님께 물어보고자 그 시간을 벌고 계셨다.

이렇게 해석하는 영성학자들도 있습니다.

어떤 것인지는 예수님만이 압니다.


땅바닥에다 뭔가를 쓰고 계셨습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거듭해서 쓰십니다.


예수님의 태도는 그 후에 어떻게 변합니까?

글씨를 쓰시고 난 다음에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기가 막힌 말씀 이였습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그랬더니 나이 많은 사람부터 물러가더라!


글쎄~~ 나이가 많아도 죄를 안 짓고 살 수 있지만

그래도 살아온 햇수만큼 뭐가 티가 묻어도 더 묻었겠지요?

그래서 나이 많은 사람부터 돌을 들었다가 놓고 물러가더라.


오늘 예수님의 태도는 우리들에게 세 가지의 묵상거리를 줍니다.

첫 번째, 예수님의 태도는 과오가 없는 자만이 죄가 없는 자만이 남에 죄에 대한 비판에 참견할 자격이 있다고 합니다.


비판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마라!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뽑으려 하지 마라!


살아가면서 우리들이 가장 쉽게 빠지기 쉬운 유혹은 자기 자신에게는 절대 관대하면서 남에게는 지독하게 비판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죄 있는 인간, 죄를 지은 인간일수록 다른 사람의 죄를 참지를 못합니다.

죄에 찌들어있는 인간일수록 오히려 더 기도해주고 유유상종(類類相從)으로 같이 가슴 아파해야 되는데 오히려 제일 먼저 돌을 먼저 듭니다.


<심판은 니가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 하신다> 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첫 번째 태도였습니다.


두 번째, 예수님은 죄를 범한 자에 대해서는 먼저 동정에 마음을 가져야된다.

우리가 죄를 범한 사람들과 대면하게 될 때에는 느껴야 될 것이 뭐냐?

‘어떠하면 이 지경까지 이르렀을까? 어떠하면 이 사람을 도와줄 수 있을까?’

하는 그 마음을 가져야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그 간음한 여자의 죄를 쉽게 용서하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 무조건 죄짓고 예수님 앞에만 나가면 용서받는구나!’

그것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돌아가라! 다시는 죄짓지 마라!’하는 이 말은

‘괜찮다. 염려할 것 없으니 이제껏 살아온 대로 마음껏 다시 살아라!’

이 뜻이 아니었습니다.


네가 이제까지 살아온 것이 모두 그릇되었으니 너 자신과 나와 싸워야 된다.

너 몸뚱아리와 싸워라!

철두철미하게 너의 인생을 전환시켜라!

그리고 더 이상 죄를 짓지 마라!


우리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고백성사 때 주님이 죄를 용서하는 의미는

‘괜찮다~’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다시 같은 죄에 떨어지지 않도록 해라!

안되면 적어도 범죄에 횟수를 줄이도록 죽을힘을 다해서 노력해라!

하는 뜻이지

‘요 죄에 대해만큼은 사해주니 나가서 똑같이 살아도 된다.’

그 뜻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은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과 같은 죄인일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함부로 남에게 비판하려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일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도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니 어찌된 일입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하시면서 절대 조건을 붙이지 않으셨습니다.

사순절은 용서하는 시기입니다.

지 자신을 용서하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내 가족들을 용서하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내 삶 가운데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하는 시기입니다.


그때는 조건을 붙여서는 안 됩니다.

잘못한 아이를 혼내면서

“그래 너, 엄마가 오늘 용서하지마는 다음부터는 이러고 저러고~~ 이러구~~ 그러면 아주 국물도 없어.”

그건 조건이 붙는 겁니다.

그건 완전한 용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무조건적으로 조건 없이 용서하셨습니다.

“내가 지금은 용서하는데 만일에 내일도 요자리에 나와서 아주 그냥 화장 야시시하게 하고 남자들 꼬셨다가는 죽을 껴!”

이런 조건 붙이지 않고 무조건

“돌아가라! 다시는 죄짓지 마라!”


사순절 동안 내마음속에 상처가 돼서 화살로 박혀있는 그 미운 한 영혼이라도 용서하는 그런 마음으로 우리가 부활을 맞이한다면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영적부활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미 이 천 년 전에 부활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부활시키는 것이 사순절의 의미가 아니라

바로 내 영혼이 부활해야 됨을~~

우리가 무엇보다도 내속에 있는 미움으로부터 부활해야 됨을~~

그리고 늘 우리들에게 따라오는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단죄하려고 하는 이 유혹으로부터 우리는 철저하게 싸우도록 합시다. 아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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