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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생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인생을 알겠는가?---도나 오쉐이 신부님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11-04-18 조회수556 추천수8 반대(0) 신고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 하십니다.’ 하여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오 26:14-25)

오늘은 예수님을 최고의회에 팔아 넘긴 유다를 생각하게 하는 ‘스파이 수요일’입니다.
복음은 배반, 고통, 죽음, 부활을 전하면서 성주간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 고통의 의미를 모를 때가 많습니다.
대중적인 문화 때문에 그 의미를 모를 때가 많습니다.
어쩌면 고통의 의미를 알 수 없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무사안일만을 바라고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미디어에서는 깎아지른듯한 절벽을 기어오르는, 소름이 끼치는 인간의 고통을 보여줄 때에도 곧 이어서 스포츠웨어나 자동차나 술 광고를 내보냅니다.
순간적으로 고통을 보여주었기에 고통에 대하여 생각할 겨를도 주지 않습니다.
어쩌면 고통은 재빨리 지나쳐버리는 것이 좋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 나는 남편을 잃고 넋이 빠져 있는 한 자매님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고통은 무섭게 짖으면서 따라오는 개와 같습니다. 그 개에게서 등을 돌리면 물리고 맙니다.
그 개를 마주 보면 더 이상 쫓아 오지 않습니다. 고통은 피할 수가 없으므로 정면대결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주간을 그렇게 얼렁뚱땅 지나쳐버릴 수는 없습니다.
고통의 의미는 잘 모르지만 우리에게 고통에 도전하고 고통의 뿌리를 뽑을 수 있는 힘을 얻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고난이 닥치면 투덜거리면서 그 고난이 자신에게 결코 이롭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고난을 슬퍼하지 않고 왜 기억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은 무슨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아무도 쉽게 답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삶은 고해(苦海)라고 합니다. 고통은 일종의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14세기에 누구보다도 고난을 많이 겪었던 헨리 수소(Henry Suso)는
고생(苦生)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무엇을 알겠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는 고생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없으며 고통을 겪고나 후의 기쁨보다 더 기쁜 것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고통은 잠시 동안의 아픔이지만 기쁨을 오랫동안 안겨 줍니다.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하면 고통을 덜 수 있습니다.
고통은 사람을 현명하고 현실적으로 만듭니다.
고생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모든 성인(聖人)들은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위로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극심한 고통을 경험했고
고통을 받아들여야, 독배(毒杯)를 들지 않게 되며
식사할 때 마시는 반주(飯酒)처럼 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수소가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은 아파하고 있습니다.”하고 말한 것은 정곡을 찔러 말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고통은 그리 심하지 않지만
스스로 고통을 비참하게 생각하고 괴로워하고(anguish) 부정하기 때문에 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영어의 ‘suffer’는 ‘allow(받아 들이다)’를 의미하지만 ‘anguish’는 ‘choke(질식시키다)’를 의미합니다.
수소가 고통을 반주(飯酒)와 같다고 말한 것은
고통은 받아들여야지 질식 당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성인들은 고통이라는 술을 우리에게 권하지 않고 다 마셔버렸습니다.
그리하여 그 술이 독(毒)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아마 그런 사람은 깊이가 없고 미숙하고 무지한 사람일 것입니다.
아마 그는 철딱서니 없는 어린애 같을 것입니다.
자식을 과잉 보호하는 부모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의 자비는 예수님을 고난으로부터 감싸지 않으셨으며
성모 마리아와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호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를 고통으로부터 보호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통을 대신 겪어주시는 것이 결코 자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책을 통해서나 지식을 통해서는 고통의 의미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고통은 매일 겪는 경험에 지나지 않으며 결코 끝나지도 않습니다.
고통은 안전이나 보호를 일깨워주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겪고 새로운 삶을 살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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