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님의 종" - 4.18,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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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11-04-18 | 조회수535 | 추천수9 | 반대(0) 신고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1.4.18 성주간 월요일 이사42,1-7 요한12,1-11
"주님의 종"
오늘은 ‘주님의 종’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신원 역시 ‘주님의 종’입니다. 이게 우리의 운명입니다.
“주님, 당신 얼굴을 당신 종위에 비추시고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시편31,17).
주님의 종인 우리 위에 주님의 얼굴을 비출 때 은총의 빛으로 주님의 종답게 살 수 있습니다. 사는 대로 생각하고 생각하는 대로 산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삶이 좋아야 생각도 판단도 올바릅니다. 사랑은 분별의 잣대입니다. 사랑의 삶 있어 올바른 분별입니다. 오늘 이사야가 ‘주님의 종’의 신원을 환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자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모습입니다. 그대로 주님의 종들인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이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이렇게 겸손하고 섬세하며 자상한 연민의 사랑으로 항구히 살아갈 때 올바른 분별입니다. 그대로 주님의 향기를 발하는 삶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마리아가 바로 그러합니다. 주님의 종, 마리아의 진가를 한눈에 꿰뚫어 본 예수님입니다.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그대로 향유 냄새는 마리아의 사랑의 향기를 상징합니다. 이와 대조적인 게 유다입니다. 마리아의 중심에 주님이 있다면 유다의 중심에는 돈이 있습니다. 두 사람의 행태나 사고는 그대로 그 삶의 반영입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유다의 지극히 합리적인 처방 같지만 그 마음 안에는 주님께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소유(돈)의 삶을 사는 유다가 존재(사랑)의 삶을 사는 마리아를 이해할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사랑은 분별의 잣대입니다. 평생 한 번 뿐인 사랑하는 주님의 장례 날을 위한 돈이라면 아낄 것이 없습니다. 마리아는 진정 돈을 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마리아를 변호하시나 유다를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유다의 삶과 한계를 이해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담담히 사랑에 의한 분별을 하실 뿐입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 않을 것이다.”
마리아의 마음을 헤아린 주님의 변호요 유다의 무지를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결정적 순간에 사랑으로 올바른 분별을 한 주님의 종, 사랑스러운 여인 마리아입니다. 주님의 향기를 발하는 마리아와는 대조적으로 탐욕의 돈 냄새를 풍기는 유다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그대로 실현됨을 봅니다.
“내가 너를 빚어…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주기 위함이다.”
아마 주님 말씀의 빛에 마음의 눈이 열린 유다는 자신의 무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빛으로 오시는 주님은 마리아와 함께 사랑의 향유를 당신께 붓는 우리 모두의 눈을 열어 주시고 어둠을 몰아내시어, 오늘 하루도 그리스도(사랑)의 향기를 발하며 살게 하십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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