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4월 20일 성주간 수요일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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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노병규 | 작성일2011-04-20 | 조회수1,252 | 추천수23 | 반대(0) 신고 |
4월 20일 성주간 수요일 - 마태 26,14-25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관점>
유다라고 해서 처음부터 배반자의 길을 가겠노라고 마음먹었을 리가 만무합니다. 처음 예수님과의 만남을 갖고, 또 그분에 매료되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따라나섰을 때만 해도 유다는 다른 어떤 제자들보다 적극적이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열렬히 예수님을 사랑했고, 신뢰했었습니다. "이 분이야말로 내 인생을 걸만한 분이야! 내 삶을 송두리째 맡겨도 후회하지 않을 분이야!" 라고 생각했기에 최선을 다해 예수님과 제자단의 살림살이를 위해 헌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의 그런 열정과 적극성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유다가 지니고 있었던 가장 큰 문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관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추종의 대상,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성취의 도구, 입신출세의 발판으로 여겼던 유다였습니다. 그러한 그릇된 관점과 노선이 어느 순간 수정되고 쇄신되었어야 했는데, 유다는 끝까지 자신의 노선을 버리지 못했기에 제자직을 버리게 된 것입니다.
한 때 잘 나가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군중이 구름처럼 몰려들던 시절, 밥 먹을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바쁘던 시절, 계속되던 치유와 기적의 시절,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것 같던 해결사의 시절이 그리웠습니다.
치유의 은총을 입고 수백 번도 더 감사의 인사를 하러오던 사람들, 덩달아 우쭐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죽었던 사람조차 다시 일으켜 세우던 시절, 끝도 없이 접수되던 기부금과 감사헌금, 군중들의 환호와 따뜻한 시선... 유다에게 있어 예수님은 그야말로 흠모와 투신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때, 수난의 때가 다가오자 군중들의 환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떠나갔습니다.
이 총체적 난국을 어떻게 설명하실까 예수님의 입만 바라보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더욱 한심합니다. 하신다는 말씀이 고작 "자신을 죽여라! 자신을 낮춰라! 서로의 발을 씻어줘라!"는 등 쓸데없는 말만 쏟아놓습니다.
전처럼 능력의 예수님, 힘 있는 예수님, 과감하게 적대자들을 물리치던 승리의 예수님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죽음 앞에 피땀 흘리시며 번민하시는 약자 예수님의 모습만이 남아있습니다.
유다는 작정합니다. 이제 떠날 때가 왔구나. 더 이상 내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구나. 떠나는 길에 사업자금이라도 마련해야지 하면서 제자직을 접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깁니다.
유다에게 있어 예수님은 더 이상 아무런 효용가치가 없는 존재가 되었기에 유다는 과감히 예수님을 떠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심각하게 점검해보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을 선택했습니까? 도대체 왜 세례를 받았습니까? 왜 신앙생활을 지속합니까?
오로지 예수님을 내 인생의 만사형통을 바라는 마음에서 선택하지는 않았습니까? 머지않아 사라질 육신의 안위와 건강만을 위해서 선택하지는 않았습니까? 내 가족의 창창한 앞날만을 위해서 선택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머지않아 우리도 예수님을 떠날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끔씩 만사형통도, 인간적인 성취도, 삶의 기쁨과 보람도 주시는 분이지만, 그 모든 것을 이 세상에서 영원히 약속하지는 않으십니다.
언젠가 우리가 그토록 추구하던 그 모든 인간적인 것들, 육적인 것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진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을 선택한다는 것은 그분의 십자가를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이웃사랑과 헌신, 희생정신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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